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요한계시록 14:12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시편 31:19-20
므낫세가 죽고 요시야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앞서 히스기야 왕의 기도로 생명을 연장 받은 후에 얻은 아들이 므낫세다. 저는 유다 나라의 최악의 왕이었다. 55년 통치하던 때에 저는 잔학하였고 음탕하였으며 흑마술과 영매, 마녀와 주술, 유아를 제물로 삼는 일까지. 음란을 일삼는 산당이 난무하였고 음란의 여신 아세라를 위해 남근 기둥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주전 640년 어린나이에 요시야는 왕위에 올랐다. “요시야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 동안 다스리며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대하 34:1-2).” 저의 나이 26세, 대제사장 힐기야를 불러 성전을 재건하였다. 이때 발견된 것이 신명기를 기록하고 있는 두루마리였다.
개혁을 시작하고 4년째,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는 회개를 설교하였다. 그의 언어와 어휘는 모세의 긴 설교였던 신명기의 것과 닮아 있었다. 저는 부친이 발견한 두루마리를 보고 깨우쳤을까? 저가 살던 아나돗은 예루살렘과 30분 거리였다. 요시야 왕과 예레미야의 나이는 서로 비슷하였다. 어쩌면 어려서부터 서로 동무는 아니었을까? 예레미야는 서너 번 요시야를 언급하였다(렘 3:6, 25:3, 36:1-2). 저의 설교는 엄연히 신명기의 것을 닮아 있었다.
요시야는 주전 609년 무깃도 전투에서 죽었다. 저의 장례식 설교를 예레미야가 하였다. “예레미야는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지었으며 모든 노래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요시야를 슬피 노래하니 이스라엘에 규례가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며 그 가사는 애가 중에 기록되었더라(대하 35:25).” 요시야의 개혁 13년 동안 예레미야는 함께 했다. 백성들의 문란한 죄의 삶을 보며 예레미야는 자주 울었다. 이를 가볍게 여기는 여느 제사장들과는 달랐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토요일 오전, 나는 여느 날과 같이 글방에 나가 묵상글을 읽고 책을 읽었다. 혹시나 했지만 열 시가 지나도 중3 아이는 오지 않았다. 아내와 연락하여 영화관으로 갔다. 녀석은 아침 일찍 카톡을 하여 영화를 보기로 한 약속을 상기시켰다. 어쩔까, 하고 망설이다 아내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다. 표를 예매하고 같이 식사를 하였다. 다음에는 아이엄마도 같이 오자고 약속하였다.
초딩 아이들이 서로 연락하여 주일 날 예배에 나오기로 서로 시간을 맞췄다. 친구랑 같이 와도 되냐, 누나도 같이 데려가도 되냐, 녀석은 들떠서 생전 안 하던 문자를 다했다. 그래도 돼. 그래 그러자. 하고 답을 하면서 묘한 감정이 일었다. 스물두 살의 아픈 아이는 오늘의 나와 다를 바 없었고, 이처럼 적극적으로 좋아하는 5학년 아이는 어린 시절 나를 참 많이 닮았다. 어쩜 이렇게 나의 또 다른 ‘나’들을 마주하게 하시는 것일까? 중3 아이의 골 부리는 반항도 다를 게 없었다.
문득문득 요시야의 혁명을 생각하였다. 그의 곁에 붙이신 예레미야의 눈물을 떠올렸다. 나 역시 사람들 많은 영화관에서,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판타지영화를 보면서,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숨 쉬기가 어려웠는데. 아이와 헤어지고 서둘러 집에 도착하였을 때의 거짓말처럼 멀쩡한 상태를 이상하게 여겼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오늘 아침 말씀을 되뇐다. 오늘 전하여야 하는 설교와 맥을 같이 하는 듯하다.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롬 14:16).” 나는 다만 두시는 데서 행하게 하심으로 이를 다하는 것뿐이다. 자주 그리 다짐하듯 생각한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더 나은 어떤 일을 벌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에게 두신 사명 가운데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우리로 인하여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게 하심이다. 아이들의 억눌린 영혼을 나는 그리 이해한다. 공부를 못하고, 부모의 외면과 억압으로 짓눌리고, 자신들의 열악함에 주눅이 들었던 마음들이다. 화평은 단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아니다. 그럴 거였으면 예레미야보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저들의 수고와 설교가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화평이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내가 아이를 생각하고 누구와 누구를 마음에 두고 이를 주께 아뢰는 일은 그러므로 혁명이다. 요시야의 것과 다르지 않다. 그저 문란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것들로부터의 뒤집어엎음이다. 당연히 두렵다. 불편하고 어렵다.
한데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이와 같이 당연한 말씀 앞에서, 내가 이제 주를 바랄 수 있는 자이어서 감사하다. 주께서 오늘 전하여야 하는 설교 중에 함께 하시기를 기도한다. 말씀을 전하는 일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일이다. 눈 먼 자의 눈을 띄우는 일이고, 앉은뱅이와 나병환자를 온전하게 하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떡과 포도주를 예수의 살과 피로 바꾸는 일이다. 이보다 더 엄연한 신비가 또 있을까?
요시야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가져오는 일이다. 예레미야의 심정이 내 것처럼 눈물겹게 여겨진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그러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 12:14).” 어쩌면 내 곁에 나를 닮은 아이들을 이처럼 붙이시는 까닭은 그래서였다.
여전히 서툴고 어눌하여 하다보면 내가 먼저 질리고 싫증이 나서 힘에 겨운 게 사실이지만, 그러면서도 자꾸 저 아이들에게서 나를 보여주신다. 그러니 말 한 마디라도, 아이 어깨를 토닥거리는 손길 한 번이라도,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나를 위로하고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일과도 연관이 있었다. 너무 긴장되어 곤죽이 될 것 같다가도 그러는 중에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일이었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롬 14:19).” 이것이 그처럼 내 영혼이 갈망하던 것이었구나. 아이들을 보다 그 억눌린 마음에서 그 영혼이 바라는 것을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서로에게 좋은 일로 인도하신다. 청년 아이는 초딩 아이들이 예배에 나온다는 말에 자신이 무언가 해줄 수 있다는 데서 들뜨는가보았다. 같이 오목을 둔다는 둥 탁구를 치겠다는 둥 어쩌면 그 안에 바라던 영혼의 위로를 그리 표현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였다.
곧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주 앞에서 우리가 하나인 것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서로가 내 이야기 같은 것이다.' 서로 닮은 것을 서로의 영혼이 먼저 알아보는 일이다. 자꾸 그처럼 마음이 먼저 앞서는 일이다. 우리는 주의 은총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로써 알 수 있겠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 31:19-20).” 내가 아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내 이야기였다. 저 아이들의 내밀한 슬픔이 내 영혼이 마주하고 있는 고통이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주를 바라는 무게였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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