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창세기 11:4-5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시편 48:1
지난 주일에 왜 안 왔니? 하고 아이에게 물었다. 그냥요, 제가 오고 싶을 때 올 거예요, 봐서 이번엔 올게요. 나는 아이의 맹랑한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하는 오늘 말씀과 오버랩 되는 것 같다. 더는 그 앞에서 할 말이 없어 난감해하는데,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하는 말씀 앞에서 두렵기까지 하다.
사람을 보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게 나였고, 나 역시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에서 좌절한다. 늘 번번이 느끼는 벽이다. 문이다 싶어 힘껏 밀려고 하면, 벽 앞에서 나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어떻게 하여야 마음을 돌릴까? 싫고 싫어서 싫증이 나고 넌덜머리가 나서 더는 말도 붙이기 싫은 마음이었다. 아이를 보면 내가 보여서, 여전히 그러한 나 자신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시 48:1).” 오늘 시편의 말씀에서 안도한다. 우리가 어떠하든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리로다. 번번이 니느웨로 가라 하신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나를 돌이켜 세우신다.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7).” 내가 잘하고 있는 모습에서 안도하는 것이 아니라, 또 좌절하고 또 실망하며 또 싫증을 내는 나를 기어이 깨뜨리시고 돌이키실 하나님의 손길에서 말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무룩한 아이처럼 뭐라 할 말을 잃었다. 기분이 언짢았고 되바라진 아이의 말에 말문이 막혀 있었다. 문득, 그래서 바울의 기도 부탁이 생각났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롬 15:30-32).”
첫째는 순종하지 않는 자들로 인하여 먼저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다.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둘째는 우리가 하는 이 일을 서로 맡아서 할 수 있기 위해서다.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셋째는 이 일을 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그리고 네 번째는 서로 격려하고 위로함으로 쉼을 얻고자 함이다.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마치 다각도의 시청각교재 같았다. 아이들로 인하여 갖는 마음과 그때마다 말씀으로 다루시는 것들이 서로 잘 조화를 이뤄 나로 하여금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리로다 (셀라)(시 48:8).” 마음을 쓰고 나름 마음을 기울여 잘 한다고 하면 그리 유난을 떠는 경우여서 더욱 넌더리가 난다. 그러니 나는 나의 간장종지만한 그릇됨을 송구하게 여겼다.
날 위해 기도해주시길. 서로의 기도밖에는 달리 감당할 능력이 안 된다는 사실 앞에서,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왜 기억해야 하는지, 무엇으로 이 기억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 오늘 말씀은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더는 바벨탑을 쌓지 않고 사는가?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구원 사역을 이뤄가고 있었다.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창 11:29).” 그리하여 우리는 아담의 후손이 아니고 노아의 후손도 아니며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기까지. 결국은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이를 알게 하시려고, 내 안에 두시는 여러 좌절과 실망까지도 조성하시는 거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눅 19:9).” 믿음으로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 다만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것뿐이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 아이가 복지관으로 바로 간다고 해서 오지 않았다. 나는 틈틈이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다. 말씀이 그때마다 시의적절 하게 나를 향하신 거였다. 부르심의 상을 향해서 달려가는 일이었다.
아이를 보고 가는 게 아니다. 나의 보람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성과를 바라며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의 법을 따를 뿐이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내 앞에 두시는 일이라서 한다. 때론 왜 하는지, 해서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지 실은 잘 모르겠다. 오히려 싸움은,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싶은 것이다. 그렇듯 정나미가 떨어질 때마다 말씀이 나를 붙드시는 걸 느끼게 된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4).” 우리의 기쁨은 여전히 바벨탑을 쌓는 일이다.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자부심을 원한다. 어떤 기대와 보람을 추구한다. 뭔가 성과를 내고 싶다. 보란 듯이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한데 하나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걸 말씀은 누누이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나 자신을 돌보는 일도, 각각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도, 이는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거였다.
정말이지 한 사람을 돌이켜 주 앞에 오게 하는 일은 천하를 얻는 일보다도 어려운 일 같다. 이렇듯 우리가 잘해주면, 하다못해 먹이는 것으로라도 그 맛에 오겠거니 싶은데 어림없다. 이는 영적인 문제였다. 이렇듯 번번이 아이 하나를 이겨내지 못하면서 나는 좌절을 맛본다. 어떤 슬픔이 또는 화가 올라오는데 그러는 내 자신이 더 싫다. 아이들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나는 혼자서 생각이 많았다.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하면서 그저 다만 아이의 어깨를 토닥거리는 것으로 말았다.
뭐라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하기 싫은 것인지, 이런 느낌이나 상황이 자꾸 고약하게 쓰다. 이어서 중딩 아이 셋이 왔는데 더는 말도 하기 싫었다. 토라진 아이처럼 나는 입을 삐쭉 내밀고 과묵함으로 나의 감정을 위장하였다. 돌아와 아내에게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하나였던 언어와 말을 흩으신 게 감사하였다. 기어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에서 쌓아갈 바벨이었다. 누가 그랬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전히 내 안에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어나는 일이었다.
거의 나다니지도 않고 사람들을 상대하며 살지도 않으면서 싫증나는 것이었으니, 지겹다. 매번 또 쌓았다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는 일이었다. 그럴수록 내가 생각하고 또 바라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시 48:9).” 다른 무엇으로 채울 위로인가?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10).” 그러므로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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