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전봉석 2018. 11. 24. 07:22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세기 12:3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20

 

 

물론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삶을 사는 데 있어 우리의 주안점이 있으나, 이 땅에서 얼마나 올바르게 사는가하는 것도 성경은 귀히 여기신다. 단적으로 잠언은 일상을 관찰하고 이를 주의하여 바르게 사는 이치를 모았다. 시편은 그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생의 삶을 조명해주는 시적인 언어와 묘사로, 기도언어로 그려놓고 있다. 잠언의 언어는 진술로 격언이 갖는 함축적인 의미로 서술되었다. 개인적으로 늘 묵상하고 되새김질하기에 찰지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 이를 입증하는 성경이다. 아이는 아침에 일어나 주기도문을 글자로 썼다며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귀히 여겨졌다. 매일 아침마다 아이가 오면서 나의 생활패턴도 바뀐 셈이다. 등교를 하듯 아이는 와서 아홉 시에 먼저 일기를 쓴다. 전날의 기억을 더듬으며 먼저 작문하게 하였다. 늘 보면 아침에 무얼 먹었는지도 금세 잊어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2교시는 성경이다. 같이 요한복음을 끝내면서도 학습을 받았고, 시편을 한 장씩 다 읽고 나면 세례를 받을 거였다. 3교시는 수학과 영어를 한다. 수학 익힘 4학년 과정은 나 또한 가물가물하여 한참을 봐야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 영어는 100일 완성 어쩌고 하는 단어집을 하루 열 개씩 외운다. 물론 돌아서면 까먹고 말지만. 그리고 열한 시 반, 조금 이른 시간에 아직 한산한 식당에 내려가 점심을 먹는다. 올라와 차를 한 잔 하고, 체육시간이다. 탁구를 치고 양치를 한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래저래 서로 마음을 쓰는 일, 주 앞에 아뢰며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눅 11:33).” 아이는 문제를 풀고 나는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다. 그래도 집중력이 좋아서 글을 쓸 때나 문제를 풀 때는 사뭇 진지하여 이십여 분 이상씩 정적이 흐른다. 때로 몸은 힘들고 마음은 어려워서 나 혼자 긴장하기 일쑤지만 얻는 유익이 크다.

 

이 일이 나의 보람과 기쁨을 위한 것이면 더는 못할 텐데,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4).” 주의 기쁨을 충만하게 한다는 것. 비록 우리의 일과는 어줍고 어떤 성과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해도 서로가 바라고 위하는 주께 향하는 마음이 같아서 좋다. 여느 정다운 친구와 어울리는 것보다 백배는 더 수월하다. 자기 생각을 기울여 논쟁을 삼고자 하는 이보다 천배는 더 편하다.

 

우리는 이제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받는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3).” 그 축복이 계승되는 것은 함께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겠다. 저를 축복하는 까닭은 하나님이 존귀하게 하심을 아는 것이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이 명료한 말씀 앞에서 더는 주저할 게 없다.

 

사람을 보고 세상을 향해 하는 일이 아니었다. 나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 하는 일도 아니었다. 아무리 존귀해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 곧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12-13).” 너무 자주 현혹되고 많은 것에서 좌절한다. 고통의 늪은 널렸고 언제든 발을 헛디뎌 빠져들 때도 있다.

 

일상은 그러할 때 어떻게 헤어날 수 있는가를 시편은 자주 언급한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50:15).” 아이와 어제 아침에 읽고 쓴 구절이다. 늘 긴장과 초조함이 가시지 않는 병적인 불안의 날들을 살고 있지만, 그래서 감정이 휘둘리고 그 오르내림을 스스로 주체할 수 없어 약물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지만.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하시는 말씀으로 큰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이겠나?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너여서', '나여서' 할 수 있게 하시는 것이었으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 그처럼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이르시는 일이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2).” 아이로 인해 그 엄마가, 안 믿는 형제와 외조부모를 놓고 기도한다. 저 가정에 아브라함이 돼야 하는 일이었다.

 

요즘은 그게 확연하여서 어쨌든 그 부모가 믿는 가정이면 뭐가 달라도 다르다. 안 믿는 가정의 아이들의 경우 저들 영혼이 황폐하여 주께로 이끌 단서가 없다. 중1 아이는 아빠에 대한 증오로 어른 남자에 대한 불신이 가득하였다. 어릴 때, 그래도 자기 기억이 있을 때 아빠는 다른 여자를 따라갔다. 십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도 아이는 자신들이 버려졌다는 데서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아이엄마는 억척스럽고 그만큼 아이에 대한 집착이 대단하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우리가 할 일은 기도라. 때로는 라면을 끓여주고 아이를 다독여 씻겨야 하는 것으로 우리의 기도는 막연한 구함이 아니라 실제로 삶에서 드러나는 실천이다. 어쩔 땐 그냥 하는 것이다. 거창한 의미 같은 걸 모색할 겨를이 없다. 우리 앞에 저와 같은 아이가 있으니까, 그 말에 귀 기울이고 할 수 있는 다독임이 물 한 잔을 건네는 일이라면 그것으로 기꺼운 것이다. 곧 그렇듯 밝혀진 등불이 저들 영혼을 비추어 저들도 그 가정에서 믿음의 조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3).” 우리는 저마다 이와 같은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그러니 그게 어디 사람이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었겠나? 우리는 모두 복을 받은 자이었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눅 1:29).” 오늘 나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었다. 내가 저 아이를 건사하는 줄 아는데 저 아이로 나를 건사하게 하시려고 주께서 더하신 은혜였다. 함께 성경을 읽고 아이의 무논리의 질문에 응대하며 위하여 손을 잡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이로써 나는 더욱 주밖에 아뢰고 구할 자가 없음을 고백하면서 주의 도우심만을 바라며 하루를 또 하루를 일상을 채워가는 거였다.

 

아침마다 아이가 오면서, 아이가 한 시에 돌아가면 잠시 소파에 누웠다가 십여 분 깜빡 잠이 드는 버릇이 생겼다. 그럴 것도 없고 안 그럴 것 같은데도 그만큼 긴장을 하고 나름은 영육간에 피로를 느꼈는지, 주님은 내게 단잠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하루 이틀을 빼고 오후 대부분을 혼자 있는 시간이라, 나는 요즘 유진 피터슨의 <물총새에 불이 붙듯>과 폴 트루니에의 <노년의 의미>와 팀 켈러의 <로마서>와 <예수, 예수>를 읽는다. 규칙도 없고 시한도 없는 자유로운 독서라 즐겁다.

 

놀라운 변화 하나는 그처럼 즐거워하던 소설보다 저들의 설교나 하나님께 향한 삶의 열정이 훨씬 더 재밌다. 그 가운데서도 일일이 성경 구절을 인용하고 그 가운데서 풀어가는, 다소 따분한 내용이 더 유익하다. 누가 알겠나만, 그래도 감사한 건 어려서부터 제대로 읽지는 못해도 늘 책을 한두 권씩 끼고 살았던 습관이 도움이 된다. 연휴나 어느 명절 때면 그때 읽을 책을 준비하곤 하였으니까. 덕분에 나는 지금 혼자 있는 시간을 어려워하지 않는다.

 

이렇듯 말씀을 묵상할 때 전날에 무슨 책을 읽었느냐, 어떤 일로 고민했느냐, 무슨 일이 있었으냐, 하는 것으로 주시는 말씀의 강도는 다르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 12:4).” 나는 저의 결연한 자세가 부럽다. 비록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6).” 그 덕분에 겪어야 했던 우여곡절이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저 또한 사람이지 않나. 예수님 외에 어떤 사람이 완전할 수 있었을까.

 

이내 살면서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10).” 그렇듯 헛발질도 해대면서 뻘짓을 하는 게 인간이라. 그럼에도 주가 건지신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17).”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이시라.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시 10:14).”

 

날마다 주를 바라며 주 앞에 설 수 있는, 이와 같은 일상이 축복이었다.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중략)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중략)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편 전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