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창세기 13:6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시편 50:7
올 겨울 첫눈이 소담하게 내렸다. 날이 푸근하여 큼지막한 눈발은 금세 녹아 질척거렸다. 곧 딸애 생일이어서 축하할 겸 같이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았다. 어느새, 스물아홉. 벌써 그리 되어진 것이 아득하였고 덤덤하였다. ‘신비한 동물들’ 어쩌고 하는 영화를 보았다. 나는 지겨워서 중간에 먼저 나왔다. 차를 사고 처음으로 세차를 하였다. 웬 중늙이가 설핏설핏 세차장 거울에 비치는 것에 놀랐다. 그 모습이 낯설어서 누구인가, 마주칠 때마다 놀랐다.
창세기에서 특히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 흐름이 아득하여 덤덤하다. 믿음의 조상으로 먼저 인식하고 마주하는 인물이라 그런가보다. 저의 결정은 하나님에 의한 것이었다.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창 13:6).” 그리하여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8).” 아브라함은 성정이 온화한 사람이다.
측은지심에 의해 저를 함께 하였고, 이런 사태에서도 조카 롯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였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9).” 이와 같은 양보는 단순히 어른으로서 나오는 게 아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14).” 이제 저는 하나님이 주도하고 계심을 알고 있었다.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15).”
자신이 수고하여 애써야 하는 일이었다면 연장자로서 마땅히 권리를 행사했을 것인데 저는 하나님이 주도하심에 대해 자신을 맡기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17).” 저의 삶은 어떠하든 주의 제단을 쌓는 삶이 되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18).” 오늘 시편의 말씀은 이를 확성기에 대고 공표하는 것 같다.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시 50:7).” 어느새 훌쩍 자란 아이들과 나의 늙음이 덤덤하여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이에’, ‘거기서’ 주의 제단을 쌓고 사는 것이어서 말이다. 종종 이제 전화번호를 지운다. 카톡에 있던 이름을 정리한다. 지나간 것으로 족한 사이다. 잊힐 권리도 있다. 더는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나도 이제 하나님이 주도하고 계심을 은연중에 안다.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
먹먹하였던 마음이 무덤덤해지는 것이다. 호들갑떨 거 없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삶이라는 게 얼마나 무난하고 무던하고 무덤덤한지. 나는 세차장에서 손세차를 하면서 거울 속의 나와 마주칠 때마다 느꼈다. 딸애 생일이라고, 벌써 스물아홉이라면서 화들짝 놀라워하다가도 덤덤하니 그것으로 이미 감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도하고 계시다는 걸, 나는 돌아보면 내 인생 곳곳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은혜를 받은 자인 것을 주어진 축복으로만 알 수 있겠나?
환난 때 주를 부를 수 있었다는 게 얼마나 큰 특권이었는지 이제는 잘 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그때마다 건지시고 나로 주를 영화롭게 하셨다. 딸애가 갓 걸음마를 배울 때였나? 천식이 왔다면서 평생 호흡기를 달고 살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고 차 안에서 펑펑 울면서 주를 불렀던 일. 그리곤 마치 기적처럼 나았고 나는 그때 부르짖던 기도를 잊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애가 저학년 때 부비동염으로 기도가 막혀서 응급실로 뛰어갔던 날도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며 엉엉 울었더랬다.
그때마다 주는 응답하셨고, 나는 금세 또 그 감격을 잃어버리곤 하였다. 그러기를 셀 수도 없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나를 건지시고, 기어이 나로 하여금 주를 영화롭게 하시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 일을 치르고 아브라함은 ‘거기서’ 주께 제단을 쌓았다. 우리 성도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거울 같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저 막연하여 추상적인 게 아니었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 8:6-7).”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때문에 나의 허물과 죄로 나를 잃을 수는 없으셨다. 돌아보면 그때마다 나는 또 배신하고 망각하여 세상을 기웃거리고는 하였는데,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7).” 감히 어찌 측량할 수도 없는 사랑이어서 나는 나의 늙음조차 무덤덤하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결 같다. 일관성이 있다. 변개가 없으시다.
그럼에도 늘 흩어버리는 죄의 습성 때문에 나는 번번이 그릇된 길로 갔고, 기어이 나를 붙들어 세워 남은 날을 주의 길로만 가게 하시려는 것이니.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온 가산을 다 주고도 ‘이에’ 바꿀 수 없었던 일, ‘거기서’ 주의 제단을 쌓는 것이었다. 얼마나 빈번하게 나는 이 사랑을 잃어버리곤 하였던가?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이내 이를 찾게 하시려고 우리 앞에 환난도 두신다. 많은 물도 홍수도 덮친다. 그럼에도 꺼지지 않는 사랑이다. 무엇도 소멸할 수 없다. 그와 같이 폭풍 가운데서 주의 음성이 들리는 것이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 38:1-2).” 우리 곁에 두시는 누구, 어떤 이의 사연과 그 곤고함을 대신하여 주를 바랄 수 있기까지.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시 50:1).”
그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주도하심을 붙들고 살 수 있는 게 복이다. 아브라함은 축복의 통로가 아니라 축복 그 자체였다. ‘너는 복이 될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우리는 그 자체로 복이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시 50:2).” 말씀이 이를 비추신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소홀히 여기지 않으신다.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3).”
말씀 하나하나가 곧 주의 사랑을 입증하고 있었다. 사람들 많은 왁자한 식당에서, 어둡고 시끄러운 극장에서, 도로변 정신없이 오가는 차들로 정신이 없는 세차장에서. 나는 순간순간 두려움에 내몰리고 어떤 불안이 엄습하여 점심으로 먹은 게 얹히고 속이 울렁거려 서둘러 안정제를 먹어야 하는 지경이지만. 그럼에도 그래서 더욱 주의 손길을 바라고 구하며, ‘이에’, ‘거기서’ 주께 제단을 쌓는 삶이란 이처럼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나의 일상에서였다.
하나님은 곧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이스라엘아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시 50:7).” 그러므로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23).” 나의 행위가 옳은 것은 내가 훌륭하고 흠 없이 잘 살아서가 아니라, 감사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서이다.
그러므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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