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전봉석 2018. 11. 28. 06:56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

창세기 16:3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편 53:2-3

 

 

보면 다 다르다. 같을 수 없다. 저는 저고 나는 나다. 하나님은 찾으시고 부르신다.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창 16:8).” 나름 사라의 기다림이 10년이면 족하였고, 아브라함은 결국 아내의 말을 들은 결과였다. 각각의 인물은 별개이면서 동시에 하나다. 하나같이 지각이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었다.

 

부모라 해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르고 같은 형제라 해도 서로가 각각 다르다. 받아들이고 이를 따르며 섬기는 일도 다 달라서,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그럼에도 우리는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 모두는 유업을 이을 자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29).” 획일적으로 하나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 아이는 옷을 엉성하게 입었다. 얼마 전에 아이엄마가 사준 패딩을 어디에 두고 잃어버렸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싫은 소릴 들었고 그래서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다. 하필 복지관에서 오후에 어딜 가야 하는 날인데, 나는 내 옷을 내어주고 그 위에 입고 가게 하였다. 그러니 그 엄마 속이 어떠할까? 미뤄 짐작을 하다 나의 부모가 겪었을 일들을 생각하였다.

 

서로 꾀를 낸다. 현실적으로 그게 더 나은 것 같다. 하나님을 바라고 먼저 그 뜻을 구하는 일보다 빠른 것이다. 이런저런 사연을 들으면 그 사정을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한 달 남짓 아이는 오만 원을 주고 이어폰을 샀는데 그게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아침 일찍 서둘러 오다 패션안경을 샀는데 그것도 얼마 못 가 버려졌다. 그런저런 일들이 어쩌면 그렇게 나와 닮았는지 모르겠다. 보면 볼수록 주가 두시는 ‘은밀한 지혜’이다.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하루였다.

 

이를 다음 본문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16).” 로마서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서로 문안하는 일에 대하여, 그 안부를 묻고 곁에서 지켜보며 관심을 두고 사정을 헤아려 서로 나누어지는 일에 대하여, 앞서 전제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이다. 거룩은 하나님의 것이다.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셨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킬 것을 바라셨다.

 

우리의 옷을 거룩하게 지어 입히셨고 그 맡은 일을 이어서 거룩하게 감당하게 하셨다. 주와 만나는 회막이 거룩하였고 이에 쓰이는 물건들을 거룩하게 하셨다. 이내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레 20:8).” 본래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부터 거룩하신 그 형상과 모양대로, 그 코에 생기를 넣으심으로 거룩하게 하셨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바로 그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해야 하는 일이 서로 문안하는 일이었다. 서로 돌보고 살펴 교훈에 어그러진 부분은 떠나라는 게 성경의 가르침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바울 사도가 말하는 교훈은 분명하였다. 힘써 지키라는 것. 거룩을 향한 것으로 우리로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신 바를 말이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2-4).” 우리는 그래서 바른 소망과 거짓 선지자를 동시에 지니고 사는 꼴이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나아가는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의 현실적인 대응을 따르는 아브라함이 동시적이다. 말씀을 붙들고 이날이때 함께 해온 사라와 문득 꾀를 내어 자구책을 찾는 사라가 동시적인 것처럼 말이다. <서로 문안하라>는 말씀으로 본문을 잡고 한 주가 시작되는 초입에서 설교 원고 초안으로 작성하며, 고스란히 그게 우리 이야기로 들려지는 데 놀라웠다. 오후께 아이 이모와 통화하면서 그런저런 일에 대하여 나를 염려하는 것을 나는 그리 답하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시는 ‘은밀한 지혜’였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시 51:6).” 나의 중심이 진실하기를 원하시는 주님이 나로 하여금 그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어려운 사정은 부수적인 일이다. 벌써 가나안에 들어온 지 10년 세월이 다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묘연하고 현실적으로 젊은 하갈이 훨씬 유용한 것이어서.

 

우린 종종 얼마나 자주 나름의 자구책을 구하느라 정작 쥐고 있던 약속을 놓치고는 하는지.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분별하라고 이르시는 거였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우리의 수고는 거기에 있었다.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레 11:47).”

 

그래서 서로 문안하는 데 있어 마치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욥 34:3).” 이와 같이 그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하는 일이었다. 들어야 할 말과 말해야 하는 말을 바로 알고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불쑥 끄집어내곤 말 곁에서 말도 안 되는 말로 실망하기 일쑤고, 종종 말 밖의 말과 말 안의 말을 가늠하느라 그 속을 알 수 없어 씨름할 때도 허다하다. 누굴 뭐라 할 게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보다 직접적으로 멀리하라,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 인사도 하지 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요이 1:10).” 떠나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 돌아서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일컫는 것이다.

 

우리에게 더하신 교훈을 붙들고 이를 훼방하는 것으로부터 떠나라는 소리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롬 16:17).” 그 교훈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2-4).”

 

나는 아이가 돌아가고 습관처럼 누워 깜빡 잠이 들었고, 일어나 아이 이모와 통화를 하고 주일 설교 본문을 뒤적거리며 그 관련 성경을 찾으면서 내게 두시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먼저는 겸손과 온유로 참아야 한다. 주의 사랑으로 용납해야 한다. 평안의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심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하나인 건 획일화된 하나가 아니라 성령으로의 하나다. 그 부르심의 한 소망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하루가 조용히 흘러갔다. 늘 어디가 아프고 무슨 어려움이 있고 쉬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은 끝도 없지만, 그럼에도 그러해서 사라가 좀 더 주를 바라고 그 말씀하신 것을 붙들고 있었으면 어땠을까? 수천 년이 흘러 오늘까지도 가자지구의 분쟁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전쟁은 계속 되풀이 되고 있는 게 그 때문이지 않나! 몹시 두려운 일이다. 보면 열에 아홉은 이혼 가정에서이고, 그 중 하나가 다른 상대를 찾아 떠난 뒤의 상처라. 아이가 병든 것에 대해 그 짊어지고 사는 날들의 고단함을.

 

문득 오늘 말씀은 자구책의 하나이면서 역사에 길이 남을 고단함이 되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였더라(창 16:3).”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해도 그것으로 갈래길은 나뉘어 전혀 다른 길이 형성되는 것이었으니, 정작 은혜가 아니면 누구도 하나님을 찾는 자가 없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시 53:2-3).” 그러니 오늘 우리가 살 길은 통회하는 마음으로 주께만 의지하는 것으로, 살리시든 죽이시든 오직 주의 은혜라.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 16:13).”

 

그러니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53:1).” 별 수 없다. 어찌 우리가 바꿀 수 있는 대목이 아니다. 과연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이는 누구인가?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