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소유를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니라
창세기 15:6-7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시편 52:6-7
믿으니, 의로 여기시고, 주어, 이끄신다. 이는 신앙의 공식 같다. 그런 우리는 두려워할 줄 알고, 하나님을 힘입어, 자기 힘을 삼가는 자들이다. 저들은 스스로 든든하게 하는 자들이지만,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함과 같이 오직 주를 의지하는 것으로만 충분하였다.
어제 묵상한 말씀과 이어진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51:6).” 오늘 다윗의 시는 사울에게 일러 무고한 어린 선지생도들을 비참히 죽게 만든 도엑의 악함을 보고 경계하며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두렵지만 저의 소행이 악함을 비웃는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시 52:6-7).” 문득 그게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나? 두려워진다.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않고 자기 힘을 의지하려 드는 것이나, 스스로 든든하게 하는 자로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정작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은밀한 지혜’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인터넷악플러(Internet Troll)들의 네 가지 성향’을 분석하여 졸업논문으로 작성한 것을 아들이 보여주었다. 저들의 자존감, 나르시즘, 마키아벨리즘, 정신병질을 바탕으로 124명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계층적 회귀 분석’한 글이었다. 그 가운데 나르시즘과 정신병질이 높게 나온 이유가 필리핀 문화(인격)가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 언어적 행동적 장애를 부추긴다는 것이다. 나중에 좀 더 심도 있게 그 글을 봤으면 싶었다.
이는 성경이 규정하는 죄의 속성과도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거나한 술판을 즐기고 춤판을 벌이고 만찬을 선호하며 스포츠에 열광하고 자연의 비경을 여행하는, 오늘 날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성향이 모두 사람들의 탐심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곧 우리네 삶이 이른 아침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을 찾아서 하고 늘 그 일에 허덕이며 바쁘게 움직이는데 이는 또한 탐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남을 헐뜯고 험담하고 추문에 귀 기울이며 익명의 커튼을 가리고 악플러로 활동하게 하는 것이다. 요즘 핫한 ‘혜경궁김씨 사건’이 그 단적인 예인데 이는 또한 우리의 시기심과 무관하지 않다. 쓰레기통을 뒤지듯 특히 연예인들 가십거리에 정신이 팔려 찧고 빻는 수다의 소재가 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것으로 마치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듯 한바탕 난잡한 놀이를 즐기게 하는, 정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고 싶은 시기심이 남을 헐뜯고 모략하고 저의 약점을 파헤쳐 부풀리고 이간하여 확대 재생산하는 것으로 언론은 이를 부추기고 연예프로는 날마다 이를 질겅질겅 씹어대며, 기자와 의사와 교수와 그 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이들의 심층 분석도 곁들여서 사람들의 보편적 심리상태를 가지고 노는 꼴이다. 그래서 아들애의 졸업 논문이 흥미로웠다. 자신을 입증하고 싶은 교만함과 쾌락을 추구하려는 탐욕과 탐심은 어느 시대에나 공존하였던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아이와 같이 있으면서 저의 무논리적 사고를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은밀한 지혜’로 이해한다. 저들이 갖는 특징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 사고의 흐름이다. 뜬금없는 말이 다음 말과 이어지지 못하고 말 밖의 세계에서 아이는 떠돌 듯 겉도는 의식 흐름을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한다. 주기도문으로 같이 예배를 맞추려다가 울컥하는 아이의 심성을 나는 사랑한다. 도대체 이런 대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 또한 내가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닐 것인데, 이는 또한 내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밀한 지혜로 여긴다.
이제는 제법 학교 수업처럼 그 일정이 규칙적이고 반복되어서 아이는 일기를 쓰고, 쓴 것을 같이 읽고 그 기억을 정리한 뒤 바로 이어서 성경공부를 한다. 아이의 기도로 같이 시편을 읽고 그 내용을 설명하고 한두 구절을 붙들어 캘라그래피로 쓰고 묵상한 뒤 기도로 마친다. 그리고 이어지는 영어, 수학은 서로가 할 수 있는 범위의 학습이다. 나는 성경을 영어로 한 구절씩 읽고 단어를 찾아 암송하게 하여보았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탁구를 치고 양치를 하면 하루 일과가 끝난다.
아이가 돌아가면 나는 가장 먼저 속이 편하고 마음이 늘어져 소파에 누웠다가 깜빡 잠이 든다. 이 또한 같은 패턴이라 일상이 되었다. 성경은 앞서 우리의 죄의 속성에 따른 형질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로 드릴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단지 생각으로, 의식으로만 주를 바라고 섬기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의 몸이 사용된다. 필요하다. 그런데 제물이란 보통 죽여서 드려지는데 ‘산 제물’로 드리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죽어져서 더는 의식이 없는 상태의 제물이 아니다. 즉 맹목적이고 타성에 젖은 신앙이 아니다. 늘 부대끼고 회의가 일고 의심이 차며 어떤 불안이 엄습하고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은 갈등과 갈등 사이에서 나는 드려지고 포개지는 제물이어야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12)”, 그러기 위해서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11).” 무엇보다 소망의 하나님을 붙드는 수밖에 없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5:13).” 즉 그와 같은 소망 중에서나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으로 환난을 참는다.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그러려니 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산 제물’로서 부지런한 것이다.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내는 일이다. 주를 섬긴다는 것은 게으름과 상극이다. 아이가 점점 일찍 오는 바람에 나 역시 등교시간이 조금 빨라져 여덟 시 반이면 글방에 올라간다. 먼저 묵상글을 되새기며 마음을 준비하고 있으면 아이가 온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종종 나의 옛날 훈련이 큰 도움이 된다. 어디 특수학교를 주말마다 가서 아이들을 대했을 때, ‘그런 모습’에 어느 정도 숙달이 된 것이다. 괴이한 몸짓은 종종 틱-장애로 오해할만하고, 무논리의 대화는 그러려니 하면서 저의 본심을 주목해야 한다. 그 내용이 아니라 왜 저 말을 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아이의 과도한 몸짓은 종종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도 들지만 악의적인 것은 아니다. 금세 했던 말을 또 하고 잊고 다시 묻는 것에 대해서도 일일이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보면 그게 다 우리의 성향과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다 그러하다. 다만 이를 표면적으로 여과 없이 표출하는 아이와 다를 뿐이다. 이때 우리의 열심은 긴급함으로 성실을 추구한다. 주 앞에서 말이다. 가령 나는 아이의 말을 못 알아들을 때 다급하게 주의 이름을 부른다. 아이가 기도할 때 나는 그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아이의 간절함을 귀히 여긴다.
어떻게?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여기서 '거룩하게'는 그리스인들이 올리픽에 출전할 때, 그 선수들을 일컫는 말로 쓰이고는 했다고 한다. 저들의 거룩은 온전히 그 한 종목에 집중하는 일로 다른 데 정신을 팔지 않는다. 삶이 엄격히 구별된다. 행여 다른 각도로 접근하면 더 나은 성적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온전히 그 경기에 몰입할 수 있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이다.
주님의 삶은 그러하여서 하나님의 뜻, 그 진리의 말씀에 전념하셨다. 이 땅에 오신 목적과 그 의미가 분명하였으며 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주께 영광을 올리시는 일이었다.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가져다주는 특권이 아닌가?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 그 옷으로 모든 좌와 허물을 덮는다. 그러므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이와 같이 말씀으로 온전히 붙들리지 않으면, 내가 무슨 수로 저 아이를 건사할까? 한들 또 무슨 소용이나 있겠나? 지레 내가 먼저 겁이 나고 마음은 어려워서 안타깝다가도 더는 어쩔 수 없는 거대한 병벽을 앞에 두고 좌절하기 일쑤다. 금세 잊어버릴 말을 해서 또 뭐 하나 싶은, 회의와 갈등을 이겨내는 일. 그러므로 ‘산 제물’로 드려진다는 것은 참으로 치열하고 반복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주님으로 옷을 입는 것이다.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옷 입는 일이다. 즉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한다. 이 옷은 그렇다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의 막연한 옷이 아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오래 참음의 옷이다. 온유의 옷이다. 겸손의 옷이다. 자비의 옷이다. 긍휼의 옷이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의 옷이다.
오늘 아침, 아브라함의 의를 믿음으로 그리 여겨주신 것에 대하여 나도 주께 간구한다. 더욱이 나의 믿음이 굳건하여서 오직 주의 말씀만으로 믿음을 삼고 내게 허락하시는 이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믿으니 그 믿음으로 의로 여기셔서 ‘이 땅을 내게 주어 나의 소유로 삼게 하신다.’ 이 땅은 오늘 내게 두시는 일상이다. 현실이다. 때론 지긋지긋한 날들이다. 이를 주시려고 나를 저 어둡던 황폐한 영혼에서 이끌어내셨다. 그러므로 오늘의 나는 거뜬히 감당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곧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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