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세기 14:18-20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시편 51:14
안 보이는 하나님을 어찌 섬길 것인가. 신앙이란 내게 보내신 이의 축복에 반응하는 일이다. 막연하여서 그저 그런가보다,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롯이 주변국의 혼란에 휘말려 잡혀갔다. 이에 아브라함은 저를 쫓아가 구해낸다. 그럴 수 있는 용기와 권세가 온전히 주를 아는 확신에서였다. 명예와 부를 추구한 게 아니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하게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실 한 오라기나 들메끈 한 가닥도 내가 가지지 아니하리라(창 14:23).”
살면서 이와 같이 주만 바랄 수 있겠나. 앞서 저는 말씀을 붙든 까닭이겠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13:17).” 이미 다 주가 주신 것이었다. 곧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12:3).” 복의 근원이 된 자의 당당한 위용이 십일조로 증거가 된다.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14: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20).” 오늘에 이르러 이와 같은 말씀을 삶으로 붙들고 살 수 있다는 게 값지고 소중하였다. 내 모든 게 주의 것임을 인정하며 살 수 있는 게 값진 일이었다. 오직 주만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길이 가장 수월하였다. 새삼 나를 그 길로 가게 하시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다. 평생을 한 직장에서 꼬박 정년을 다 채우고 내후년 퇴직을 앞둔 손위처남은 그 남은 생을 무엇을 하며 살까, 생각이 많았다. 나는 주를 생각하는 그 마음으로 주를 바라며 살 수 있기를 바랐다. 저의 처가 쪽과 어울려 사업을 확장하고 돈 버는 궁리를 하는 데 경계하였다. 주를 따라 가는 길은 아브라함이 보였던 그 길이다.
우리로 주를 바라며 주 앞에 서게 하신 일,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시 51:14).” 돌이켜볼 때 오늘이 가장 귀하고 감사하지 않나. 그러므로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15).” 유독 영어를 좋아하니까, ‘영어성경 에세이’를 가르치면서 늙어가는 게 어떤가? 하고 물었다. 그저 낭만적인 게 아닐 거였다. 그때 되면 주가 또 이끄실 거였다.
우리는 다만 주께 서는 자들이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17).” 어머니가 곁에 계셔서 말씀 드리지는 못했으나, 젊은 날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게 살아왔던가? 이를 돌아보면 오늘 우리에게 허락하신 날들이 복에 복을 더하신 것임을 이미 알 수 있었다. 하면 그 심령으로 주의 인도하심 앞에 남은 생을 맡겨두시길. 어찌 인도하실지 알 수 없으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으니.
하여 합심하여 함께 기도할 것을 말씀으로 위로로 격려하였다. 점점 위로가 메말라 위로를 자처하는 세상에서 행여 스스로를 위하여 괜찮다, 말하는 일이 없기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서로 꾸며서 들려주는 이와 같은 거짓 위로가 실제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23:17).”
소욕을 주시면 신학을 공부함도 좋으련만, 그건 권해서 될 일은 아닌 것이고. 한 영혼을 위해 자신의 남은여생을 헌신하길 바란다면 그에 합한 길로 인도하여 주실 것을 확신하였다. 점점 뭐라 나무라는 부모와 교사와 어른이 사라지는 이 시대에,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암 6:1).” 두려운 마음으로 이와 같은 말씀을 받으시길. 단지 이를 돈벌이 수단으로 여길게 아니라.
예배를 마치고 그처럼 둘러앉아 옛 이야기에 젖었다가 남은여생을 두고 어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형님에게 나는 그리 권하였다. 농담처럼 이제 20년 후면, 10년 뒤면, 하는 말을 이어하기에 그리 말하였다. 늘 저의 기도제목처럼 두 아들과 처가 부디 주를 영접하고 함께 이 길 위에 서기를. 그러려면 더욱 단호하고 엄중하게 먼저 말씀 앞에 자신이 세워져야 할 것과 주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두려워 떠는 영혼으로 서기를.
마치 낭만에 대하여 말하듯 은퇴 후 스스로 위로하고 쉬는 쪽을 바라는 마음에서, 부디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울 수 있는 자의 특권이 있었으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결국 우리에겐 주의 위로만이 살 길이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우리의 사명이면서 또한 경계의 말씀이었다.
앞서 설교에서 전하였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정작 그때가 이르러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임을 주님은 일찍이 경고하고 계신 거였다. 책 읽기도 일정기간 연습이 필요한 것처럼 누구를 위하여 그 한 영혼을 붙들고 씨름하는 일도 지금부터라. 먼저는 두 아들과 처를 놓고, 그러면 마음에 두시는 이를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알게 하시는 이가 있었으니.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결코 쉽지 않은 것이어서, ‘힘쓰라’는 말씀 앞에 주를 더욱 바라는 일이었다. 내 의지로는 어찌 되는 게 아닐 거여서 말이다. 은퇴 후 할 일 가운데 여전히 자신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몇 개월 쉬면서 어디 좀 여행을 다녔으면 하는 일을 꾀하고 있었으니, 옳고 그름을 떠나 그것까지도 주께서 어찌 인도하실지 바라고 구할 수 있으면 더 좋을 것을. 때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게 부당할 때가 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 5:14).”
하나님이 그리 하시는 일이 아닌가?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눅 6:29).” 어떻게 그처럼 살 수 있겠나? 나야말로 죽었다 깨어나도 그리할 수 없음을 아는 일이어서, 다만 이제는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사는 것이 유익하였다. 들려지는 데가 광야와 같아서 어찌 다룰 수 있는 우리 능력 밖에 일들에 대하여,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그 일이 곧 주의 길을 놓음이다.
도대체 이런 데서 뭘 하고 있나싶고, 과연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싶은. 저의 처가는 온통 돈벌이에 남은 생의 과업을 다 쏟아붓는 셈이었으니 온 가족이 눈을 뜨면서부터 눈을 감기까지 하루 꼬박 장사에 매달리고 있었으니. 보기에 좋지 않은 것이다. 그러느라 종교는 사치고 신앙은 괜한 여유 같아서 빈 공간을 늘려 업종을 하나 더 차렸다고 하니 그래놓고는 늘 인사가 사는 게 고역이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이다. 그러는 동안 부여된 자식들은 멍들어가고 막냇동생은 심신미약을 호소하면서.
뭐라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우리가 복이라. 한 것도 없이 이처럼 주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롬 15:30).” 서로가 주를 바라며 살 수 있다는 게 참 복이었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우리가 주께 바랄 수 있는 것 자체로 소중한 일이다.
이는 우리의 갇힌 영혼을 구하는 길이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허무맹랑한 이론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고후 10:4).” 그러므로 늘 마음에 두어 처가와 두 아들을 위해 함께 기도하시길. 나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신다는 데 확신하였다. 내게 두신 일이라.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느 1:11).” 곧 오늘 우리의 형통함이 저들에게 산 증거가 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바울은 바란 것이다.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롬 15:32).” 오늘 우리 영혼의 안식은 주를 바라는 데서이었다. 그리고 이를 나누는 자리가 우리 역할이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33).”
그러므로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시 51:6).” 죄에 빠져 부끄럽기 짝이 없던 가운데서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7).” 주로 인하여 정결케 됨으로 우리는 이제 바란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12).” 곧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15).”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곧 주의 기쁨이시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16).” 어떤 종교적인 행위나 거룩을 행사하는 일에서가 아니라, 주께 자복하고 통회하는 마음이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17).” 그리하여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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