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02 주일
로마서 16:16-20
서로 문안하라
16:16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6:17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16: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16:19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들어가는 말
꽤 먼 길을 달려온 듯하다. 돌아보면 한 뼘 길이밖에 안 된다. 지난 4월부터 시작해서 우리는 로마서를 본문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서 다시 문이 열리는 것 같다. 서로 문안하라. 곧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후 13:12)." 이는 앞서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같은 성도로서 우리에게 문안한다. 우리의 이 길은 결코 우리만의 나의 유독 외롭고 고독한 길이 아닌 것이다. 우리 곁에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모든 성도가 서로 문안한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저들은 모두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달려왔다. 이는 오직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하였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달려가신 길이다. 지금은 하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성령으로 온 지혜가 우리 일상에서 소리 높여 우리를 외쳐 부른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잠 1:20-22)." 저들은 그러해도 성도는 그러하지 않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
하여 오늘 말씀은 우리가 우리에게 남은 인생을 다하기까지, 서로 문안함으로 힘이 될 것임을 분명히 한다. 이에 오늘 우리는 우리가 우리 곁에 두시는 이를 돌보고 서로 믿음 약한 자를 받아(롬 14:1) 저의 어려움을 우리가 담당하는(15:1) 일을 맡았다. 서로 문안함이란 다른 말로 그런 의미다. 예수님은 이를 명쾌하게 정리해주셨다. 그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 22:37-38)."
그리고 둘째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39-40)." 그러니 과연 우리는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어찌 사랑할까? 어떻게 이를 증명하며 살까? 그래서 서로 문안하는 것이다. 곧 우리의 삶은 공적인 삶이다. 우리는 그 누구도 사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싫든 좋든, 인정하든 부정하든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1. 서로 문안하라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6)."
서로 문안하는데 있어 그 전제가 있다. '거룩과 입맞춤'이다. '거룩'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이다. 우리는 이를 어찌 감당이 안 된다. 이해도 어렵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래서 올림픽 출전 선수들을 거룩하다고 여겼다. 저들은 출전하는 올림픽 경기에서 좋은 기록을 내기 위해 모든 것을 절제하였다. 자신의 개인적인 삶을 포기하였다. 그리한 것은 장차 누릴 영광을 목표로 바랐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님도 합하여 그리 하나님의 뜻에 전심을 그 맡으신 사명을 다하신 것과도 같다. 그러기 위해 우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본문 17절은 그 단서를 제공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17)." 뒤에서 차차 언급하겠지만, 그럼 '그런 자들'을 떠나가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분별하라.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두말할 것 없이 오늘 우리 사회가 얼마나 혼탁하고 어수선한지 분별해야 한다. '그럴 수 있지, 다 그러는 거야' 하는 식으로 안이하게 허용할 때 경계는 모호해지고 신앙은 옹색해진다. 엄히 일러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레 11:47)." 꼭 그래야 하나싶지만, "입이 음식물의 맛을 분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욥 34:3)." 우리는 분별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둘째, 멀리하라.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 득시글거리듯 점점 더 난무해지는 이단들 속에서 조금만 방심해도 많은 이단이 다가온다. 얼핏 들으면 저들 말은 합리적이고 타당하다. 사람을 이롭게 하고 인류 번영에 이바지 하는 삶으로써 사람 사는 이치에도 맞는 것 같다. 결국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을 대신할 것들이 너무 많아 보인다. 그런 저들은 뭐라 해도 들을 귀가 없다. 맛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두 번 훈계하다 멀리하라. 별 수 없다.
셋째, 인사도 하지 마라.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요이 1:10)." 그럼 여기서 자주 언급되는 이 교훈은 무엇인가? 곧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2-4)." 우리는 이와 같은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들어오면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고 멀리해야 한다.
넷째, 돌아서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그러니까 그냥 분별하고 이를 지식적으로 알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니다. 멀리하는 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단호해야 한다. 인사도 말고, 돌아서야 한다. 돌아선다는 것은 같은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 냉정하고 편협하게 들리는 것 같지만 본디 병은 전염이 돼도 건강은 전염되지 않는다. 병든 영혼과 있으면 건강한 영혼도 병든다. 우린 저들을 고칠 수 없다. 낫게 할 수도 없다.
다섯째, 떠나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 3:6)." 곧 여기서 게으름은 영적으로 가장 큰 적이다. 악함보다 무서운 게 영혼의 나태함이다. 무기력하고 안이한 것이다. 무신경적이고 무덤덤한 것이다. 이는 말도 안 된다. 누가 살이 찢어지고 집에 불이 나고 애가 죽게 생겼는데도 그러려니 하고 말까?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편'에 보면 가장 저열하고 낮은 지옥의 바닥에는 의도적으로 주의 뜻을 멀리하고 거절했던, 게으른 영혼들이 꽁꽁 언 상태로 부들부들 떨고 있다.
2.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람들: 그럼 도대체 '그런 사람들' 곧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1) 교훈을 거스르는 사람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17)."
거듭 나타내는 교훈은 무엇인가? 먼저는 겸손하지 않은 것이다. 다음은 온유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오래 참음을 훼방하는 것이고, 서로 용납하는 자비와 긍휼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으로 하나 된 자들이다. 이를 어찌 증명할 수 있을까? 바울 사도는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교훈을 증거하였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2-4)."
베드로 사도도 '그런 자들'을 '거짓 선생'이라 하였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벧후 2:1).” 사도 요한은 '거짓 선지자'라고 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이처럼 우리가 분별하지 않을 때 저들은 우리 곁에 득시글거린다.
그러므로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올무에 빠진다.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6-7).” 왜냐하면 저들은 항상 우리 곁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2)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8)."
가만히 들어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저들을 허용한 것이다. 저들은 애굽에서부터 나올 때도 섞여 나온 무리였다. 그런 그들이 우리를 어지럽힌다.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민 11:4)." 곧 우리의 그릇 행함은 저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그 이방 나라들과 섞여서 그들의 행위를 배우며(시 106:35)." 이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를 판별할 수 있는 빛을 주셨다. "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잠 29:13)."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갈 2:4)." 이들은 먼저 우리의 자유를 엿본다. 때론 목마름으로 혹은 고기를 먹고 싶어서 또는 적들로 둘러싸여 두려움으로 우리를 틈타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게 한다. 단지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1: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다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요일 4:6)." 저들을 대적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어떻게 대적하는 것일까? 첫째, 땅에 속한 지체를 죽이는 일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땅에 살면서 땅에 속한 지체를 죽이는 일이라니! 이 어찌 거룩하지 않겠나? 우리 안에서 여전한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그래서 둘째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열매로 이를 살펴야 한다.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물론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선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옷을 덧입는 것이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3) 자신들의 배를 섬기는 사람들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8)."
여기서 배는 어떤 곳인가? 무의식의 깊은 곳. 트라우마가 있고 콤플렉스가 몰래 숨겨져 있는 곳이다. 그래서 저들은 역설적으로 남의 말하기를 좋아한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자꾸 다른 사람 말하듯 한다. 자신은 별개다. '내로남불'이란 말처럼 자신에겐 관대하고 남에게는 완고하다. 한데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5-16).”
즉 우린 우리 스스로 얻을 수 없다. 야고보 사도는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약 3:13-16).” 다시 말해 행함으로 보여야 한다는 소리다. 온유함이란 어린아이가 엄마의 젖을 물고 만족하는 것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주의 말씀으로 우린 붙들린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그래서 이를 위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라 따르라고 하셨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8-39).” 이는 참 고역이다. 자기 십자가를 거둬가 주시면 훨씬 더 좋겠는데, 성경은 늘 이처럼 역설적이다. 한데 보면 우리의 고난이 생의 추 같다.
중심을 잡는 추와 같아서 그릇 행하는 길을 막아준다. 마치 항해하는 배에 일부러 실어두는 일정한 평형수 같다. 이를 우리가 짊어지려 하면 어림도 없이 무거워서 지레 그 무게로 설 수도 없지만, 주의 은총의 물 위로 항해할 때 더는 무게를 느낄 수조차 없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균형을 잃지 않는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30)." 결코 저들은 따를 수 없는 이유다. 저들은 자신들의 배가 신이다. 자기만족을 위해 산다. 그 영광은 결국 부끄러움뿐이다. 땅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3.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19)."
세상 일 좀 몰라도 된다. 어떤 유행이나 문화에 조금은 둔감해도 된다. 지나치게 남들처럼 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근신하는 자들이다. 깨어 있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사탄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다들 설마, 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 있는 이유이다. 그래서 아무도 우리를 교묘한 말로 속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골 2:4).”
저들은 특징은 뚜렷하다.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3).” 탐심은 모든 악의 그림자다. 그 마음은 늘 잘 먹고 잘 사는 데 기울었다. 스포츠에 열광하고 자신의 취미를 위해 전념한다. 세계 곳곳의 비경을 여행하며 그와 같은 감상을 낙으로 삼는다. 여기서 탐욕이 자란다.
탐욕은 그래서 이른 시각부터 늦게까지 활기차게 일할 것을 강조한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을 보람으로 삼는다. 이는 남을 견제하기 때문이다. 저를 시기하는 것이다. 저들처럼, 남부럽지 않게 살려는 게 목표다. 저들은 마치 불의를 보면 못 참는 것처럼 남의 말에 악플을 달고 이를 숨어서 즐긴다. 어디 쓰레기통을 뒤지듯 남의 가십거리를 찾아 말잔치를 벌이고 낄낄거린다. 정욕에 사로잡혀 자신은 다 괜찮은 줄 안다. 생활이 난잡하다는 것을 자신들만 모른다.
4.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19)."
앞서도 말한 것처럼 우리만 이런 게 아니다. 부자나 가난하나, 건강하고 병약하나, 많이 배웠거나 적게 배웠거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려고 애쓴다. 그러지 못해 애통해 한다. 그럴 수 없어 주만 바란다. 그래서 저들은 심령이 늘 가난하다.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 것으로도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저들은 온유하다. 주의 말씀에 순복하기 때문이다. 애통해한다. 남을 긍휼히 여긴다. 그 마음이 청결한 까닭은 아침저녁으로 치운다. 곧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은 산상수훈의 '팔복의 사람들'이다(마 5:2-10).
이는 우리의 선진들도 그러하였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2).” 다윗은 결코 완전한 자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절규하였고,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하는 놀라운 진리를 붙들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흠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모세도 바울도 베드로도 모두가 그저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도저히 별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만 저들은 이 복음을 맛보았고 들었고 깨달았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
나오는 말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0)."
그리하여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21-22).” 저들은 오늘 우리를 문안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승리한 싸움이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창 3:15).” 하나님이 싸우신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보란 듯이 우리의 기필코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롬 12:11)." 우리가 그럴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 제물은 죽은 채 드려지는 것인데 바울은 우리를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누릴 영생의 영광을 위해서,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처럼, 허다한 우리의 증인들처럼,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이에 우리의 사명은 이 땅에 사는 그날까지 계속된다. 서로 문안하고 돌보아 서로를 받고, 그 약함을 담당하고, 함께 함으로써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롬 16:1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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