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로마서 15:30-33 / 합심(合心) 기도

전봉석 2018. 11. 23. 11:11

20181125 주일


로마서 15:30-33

합심(合心) 기도



15:3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15:31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15:32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15:33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들어가는 말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한사코 외면하고 사는 생과 사의 구분을 가르치는 것 같았다. 우리가 왜 소망의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뿐이라는 걸 알게 하셨다. 더욱이 우리의 합심 기도의 필요성을 오늘 본문은 알게 하신다.


앞서 우리에게 맡기신 생의 과제를 살펴보았다. 첫째는 믿음이 약한 자를 받고 저의 약함을 담당하는 일이다(롬 14: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가 주를 사랑한다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하시는 말씀 앞에 붙들린다(요 21:17). 사랑은 막연하고 추상적인 구호나 다짐이 아니다. 구체적인 실천이며 지긋지긋한 일상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둘째는 이 모든 게 우리의 기쁨을 위한 게 아니다(롬 15: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보람을 얻거나 삶의 가치를 얻고자 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다만,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이것이 기준이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그 수고가 자기의 기쁨을 위한 것이면 하나님과 상관없다. 이는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4).” 곧 주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셋째는 그러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성경의 위로와 소망을 붙들어야 한다(롬 15:4-6,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곧 성경이 없는 기도는 감정에 의한 감상에 젖어 자기 위로가 되기 십상이고, 기도는 없이 성경만 따르려고 하면 자기 지식을 추구하기 위한 지적유희에 불과하다. 그것이 자기 확신을 더하고 신념으로 둔갑하는 경우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위로로 인내하고, 우리의 인내는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한마음과 한 입으로 주께 구하고 기도한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5-6).”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그리할 때 저들(이방인, 믿음이 약한 자)로 우리와 같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수 있다(롬 15:9-12, “이방인들도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된 바 그러므로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또 이르되 열방들아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라 하였으며 또 모든 열방들아 주를 찬양하며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하라 하였으며 또 이사야가 이르되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하였느니라.”). 이는 공식과 같이, ① 우리가 저들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송하면(9), ② 저들도 우리와 함께 즐거워하고(10), ③ 우리와 같이 주를 찬송하게 되면서(11). ④ 우리는 같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된다(12).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였다(고후 3:3). 우리의 삶은 읽혀지고 보여져야 한다.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한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2:15).” 곧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일이란, 이처럼 우리의 일상이고 소명이며 생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본문 이해


오늘 본문은 먼저 바울 사도가 로마를 가게 되는 목적을 기록하고 있다(14-15,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즉 말씀을 받았으면 스스로 그 마음에 선함이 가득하고, 이로써 서로 권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벧후 1:12).” 서로의 안부를 묻고 근황을 살피면서 어찌 믿음 안에서 자라가는가 돌보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은 일이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 15:16).” 우리로 주를 증거하는 삶이 되게 하려고, 바울은 자신의 선교 사역을 설명하고 있다(17-21,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 된다. 오늘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이를 나누기 위해서다. 곧 “그 일은 말과 행위로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일이다(18-19).


우리의 일상은 부르심을 받은 곳이다. 새로운 어떤 곳을 찾고 자신이 바라는 일을 추구하는 이상이 비전이 아니다(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의 결연한 의지가 단지 개인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처럼 성경에 기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21).” 한데 그 일이 그처럼 순탄하지만은 않다(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바라고 바라는 우리의 바람은 자주 좌절에 부딪친다(23-24,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종종 선한 일로 인해서도 지체된다(25-26,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결국 우리는 영적으로 빚진 자이며 그것은 육적으로 실천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게 마땅하다(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신앙을 마치 구호나 종교행위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영적으로 빚진 자들이다. 이를 나눠 가지려 해야 하고, 이는 실제적인 섬김으로 드러난다. 이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다. 우리가 누구를 대신하여 기도하고, 저를 위해 마음 쓰고, 일상에서 저를 위하여 시간을 할애하고, 같이 하는 우리의 일들이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28-29).”



합심 기도를 위한 자세


오늘 우리 사회는 얼마나 위로에 갈급하며 사는지 모른다. 심지어 스스로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격려하고 위로를 하는 시절이다. 그러니 서로 말하길, 괜찮아! 넌 할 만큼 했어! 네 잘못이 아니야! 수고했어! 하는 따위의 위로가 난무하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 6:14).” 서로 자꾸 괜찮다, 다행이다, 잘 될 거다, 하면서 이를 마치 긍정적인 위로인 듯 부추긴다. 그로 인하여 자기 의를 나타내고, 자신의 기쁨을 도모하며, 스스로의 주인을 자신을 여기려 하는, 죄의 속성에 대해 점점 둔감해지는 것이다.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23:17).” 그것도 부모가, 교사가, 목사가, 충분히 뭐라 충고하고 나무라고 바른 길을 일러주어야 할 사람이 더 그런다.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머리인 지도자들이여 이스라엘 집이 그들을 따르는도다(암 6:1).” 점점 훈계를 잃어가는 시대이다.


이에 우리는 울어야 한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저들을 위해 애통해할 줄 알아야 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그러므로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정리하면, 첫째는 우리가 자꾸 서로의 간극을 좁혀야 한다. 점점 서로가 거리를 두고, 친절한 타인으로 사는 데 익숙해지는 이 시대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너른 길 저편에서 멀찍이 서서 서로를 마중하고 배웅하는 일은 쉽다. 타인으로의 관계는 그냥 친절하면 된다. 적당히 그만큼 떨어져서 안부를 묻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정도이면 족하다. 그런데 골목 그 협소한 길로 들어서면 듣기 싫은 옆집 소리가 들린다. 저들이 사는 역겨운 냄새도 난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은 이런저런 일을 알게 된다. 자꾸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저 아이 부모가 어떠한지, 그 가정은 어떠한지. 자고로 옛 말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동네 사람들 모두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했다. 왜 굳이 알아야 할까? 마음을 열지 않으면 기도가 스며들지 않는다.


둘째는 실제 서로가 같이 나누어 짊어져야 하는 일이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 5:14).” 그런데 그게 어디 말씀처럼 쉬운가?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눅 6:29).” 그러자니 죽을 맛이다. 때론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어서도 작은 교회를 피한다. ‘완벽한 타인’으로 사는 데 익숙해진 사람들은 점점 대형교회를 선호하기도 한다. 적당히 알고 적당히 친절하면서 널찍한 자리 저만큼에 떨어져 앉아 있고 싶다.


그러면 좀 수월할 것 같은데 그래서 더 공허감이 밀려든다. 교회를 다니긴 다니는데 굳이 꼭 이 교회가 아니어도 괜찮은 정도이고, 내 옆에 두신 저 사람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관계이다. 그러면서 황량한 마음에 치를 떤다. 성경 외에 다른 말씀을 갈구한다. 누구의 간증을 선호하고, 어디 안 믿는 사람들처럼 사주관상에도 관심이 있다. 다른 위로를 구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우리에게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그 의미를 분명히 하였다. 풀풀 먼지만 날려 풀 한 포기 날 것 같지 않은 광야 같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다만 외치는 자의 소리여야 한다.



합심 기도의 목적


오늘 본문은 이를 견디고 인내할 수 있기 위해서도 합심하여 기도하기를 가르친다.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롬 15:30).” 오늘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를 부탁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롬 15:31-32).” 여기서 합심 기도의 능력을 배울 수 있다.


첫째는 순종하지 않는 자들로 인하여 우리가 먼저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서로의 합심 기도가 필요하다. 물밀듯 밀어닥치곤 하는 환멸에 빠지지 않으려면 말이다. 둘째는 우리가 하는 일을 서로가 받아서 함께 할 수 있기 위해서도 한마음으로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실제 우리는 누구의 배려에 익숙하지 않다. 어떤 이의 관심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적당히, 조금은 멀찍이 서서, 거기 그쯤에서, 안부를 묻고 위로를 하고 격려를 대신하면서 그 정도면 족하게 여긴다. 더 가까이 오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사이로 떨어져 지내는 것도 싫으면서!

사족이지만 종종 나는 ‘기도할게요.’ 하는 나의 인사가 적당한 거리 두기를 대신하여 쓰이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알았어, 안 됐네, 쯧쯧.’ 하고 혀를 차는 정도에서 저를 적당히 밀어두고 성가신 일에 끼어들지 않으려고, ‘기도할게요.’ 하는 정도에서 더는 한 발짝도 다가가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기도는 결코 거리두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철저한 관여다. 내 일로 가져오는 참여다. 대신 저의 일을 붙들고 씨름하는 아룀이고 씨름이다. 저로 인해 불편한 마음이어서 자꾸 신경이 쓰여 힘들고 어려운 상태다. 나는 이를 종종 연애하는 마음 같다고 표현한다.


셋째는 이와 같은 일을 하는 데 있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기쁨을 잃지 않기 위해서도 서로의 합심 기도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어떤 보람을 느끼기 위한 게 아니다. 스스로 할 도리를 다한 것처럼 자신에게 면제부를 주는 게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떠하든 우리가 서로 하나님의 뜻을 잃지 않기 위해, 그 의미를 상기시키고 그 만족과 기쁨을 하나님께만 두는 역할을 한다. 곧 서로 기도 제목을 서로 나눌 때, 그저 일반적이고 막연한 정도의 나눔은 더 이상 가까이 하는 것을 서로 꺼리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위로를 위해 서로 기도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다.


넷째는 그리하여 우리의 합심 기도가 서로의 만남을 격려와 위로가 되어 함께 쉼을 얻고자 함이다. 흔히 속엣 얘길 털어놓으면 한결 후련하고 가볍다는 원리도 이와 같다. 서로 친밀해지는 역할도 한다. 심리학에서도 그래서 서로 고백하고 위로하고, 같은 마음의 사람들끼리 도움을 구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혼자 알고 있으면 무의식으로 잠식될 어둠이지만 밖으로 표출하여 서로 직고하고 고백함으로 한결 밝고 홀가분해지며 무거운 짐이 가벼워진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결국 합심 기도는 마치 옥에 갇힌 것 같은 우리의 영혼에 한 줄기 빛과 같은 소망을 가져다준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 우리의 싸움은 육에 속한 것이 아니므로 항상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 능력을 구사할 수 있는 게 서로의 기도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고후 10:4).” 이때 합심 기도는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는다. 사랑의 본질이 기도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잠 10:12).”



나오는 말


합심 기도의 능력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증거로 제시된다. 예수님은 이를 강조하셨다.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 18:19).” 성령의 충만함도 이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어떤 급박한 상황에서도, 옥에 갇힌 베드로를 구하였다(12:5-12). 심한 고통 중에서도 살 소망을 준다.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게 한다. 서로의 도움이 합심 기도에서 나온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8-11).”


은혜 베푸심을 알 때도(창 24:12-14),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나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느 1:11).” 곧 숱한 역경 가운데서도(고후 11:23-27), 기도는 비로소 우리 영혼을 편히 쉬게 한다.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롬 15:32).” 그리하여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3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