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전봉석 2019. 1. 2. 07:12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출애굽기 1:20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시편 88:13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출 1:17).” 당장 닥친 일보다 하나님을 먼저 우러르며 그 뜻을 살피는 일이겠다. 말이 쉽지 이는 목숨이 걸린 문제고, 어떤 불이익이 올지 모르며, 자신뿐 아니라 그 일가친척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어서! 한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20).”

 

누구도 철인은 없다. 두려운 일이고 괴로운 일이며 견디기 힘든 일이다. 이에 우리의 특권은 기도다.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시 88:13).” 다들 다른 길을 모색하고 어떻게 좀 모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오직’ 주께 부르짖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일인지. 우리는 결국 하나님 안에 감추인 생명을 가졌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 결국 나는 죽고 나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역사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고백이 내 것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 놀랍고 귀하다. 주의 안위하심이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새해 첫 날 우리는 신년감사예배를 드렸다. 올 수 있다던 아이는 오전에 일찍 조부모 댁에 갔고 왔으면 하는 아이들은 감감무소식이었다. 나는 올해 우리의 일상이 늘 예배가 되기를 말씀을 전하였다.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하는 고백이 매순간 드려지는 우리의 탄성과 고백이 되기를.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8:1).”

 

우리 입에서 저절로 터져 나오는 그와 같은 탄성이 예배다. 이로써 주의 영광이 날마다 매순간 우리 일상을 덮어주시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였다. 주님이 ‘언약의 보증’이 되어주셔서 새로 허락하신 해이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눅 13:8).” 그 말씀을 따라 주가 이루실 것이다. 우리는 다만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억지로라도 그리하자고 당부하였다. 소리 내어 읽고, 듣고, 느낌으로 삶 가운데 실천하는 삶으로 그 자체로 예배가 되는 것이다. ‘갖다 먹어버리라’ 하시는 말씀처럼(10:9-10), 내 입을 벌리고 내게 넣어주시는 말씀을 먹어야 한다(겔 2:8-9). 먹어서 배에 넣고 창자에 채워야 한다(3:1-3). 그렇듯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렘 15:16).

 

더도 덜도 말고 올해는 예배로 드려지는 해인데, 말씀을 가져다 먹고 씹어 배에 넣고 창자를 채워, 그 기력으로 사는 날들이 예배인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할 때,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 이는 우리가 어떤 행위로 드러내고 수고와 노력으로 이뤄지는 일이 아니었다. 다만 주의 섭리 가운데서 그리 이루시고 다스리시는 일이었다. 그러할 때 전도서의 말씀은 간결하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감히 이유를 묻고 어떤 일에 토를 달아 자신의 생각을 운운하며 따져 묻는 게 지혜가 아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것.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는 고백의 날들 위에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나는 이를 예배라고 생각하였다.

 

정해진 시간에 모여 특정한 장소에서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우리끼리 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다만 그리 더하여 확신하고 서로의 기도가 되는 것이지 실제는 실상의 일이었다. 예배란 그리 매순간 우리의 소소한 삶의 전부가 되어지는 것이다. 이를 가장 여실이 드러내는 성경이 시편이다. 고통을 호소하다 회의하다 주께 부르짖다 다시 마음을 다해 주를 바라며 또 힘겨움에 엎드렸다가 기뻐할 수 있는, 때로는 지긋지긋한 현실의 모든 게 그 안에 매뉴얼처럼 담겨 있다. 이러할 때 야고보서는 기가 막히게 명료한 방법을 알려준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이 둘은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용빼는 장사 없다. 그럼에도 다들 자기 확신을 붙들고 산다!

 

전 대통령 부인이 말하길 이 나라의 민주주의 기틀을 만든 이는 자신의 남편으로 저는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하였다. 광주 학살의 주범으로 법정에 넘겨지고 착복한 은닉 재산을 몰수당하며 여전히 추징금을 해결하지 못해 뭇 국민들의 지탄이 되는 것인데도, 그리 당당하게 말하며 서로 자부하는 데 소름이 돋았다. 단지 저들만 정신이 이상해서 그러한가? 자신을 오늘에 두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예배하지 못하는 순간순간은 모두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저마다 자신이 옳은 것이다. 나름 자부하며 사는 것이다. 도무지 들리지 알고 느낄 수 없는 일들에 대하여, 청맹과니 같은 삶이 얼마나 자자한가?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도 자칫 예배로 드려지지 못하는 순간마다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요셉이 죽었다. 저는 애굽 온 국민의 추앙을 받던 영웅이었다. 그리 산 세월이 14년으로 족하였을까? 저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었다. 사람의 앞뒤는 다르다. 위협을 느끼는 쪽에서 선제적으로 일을 도모한다. 그것은 억압뿐이다.

 

그러할 때, 그러해도,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신 18:13).” 어떻게 나 같은 위인이 완전할 수 있겠나? 하는 회의적인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완전함이란 주 앞에서이다. 하면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과 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실의에 빠지는, 어리석고 미련한 존재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 앞에서 내가 완전할 수 있는 일이란,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시 88:13).”

 

어쩌면 너무 간단하다. 나는 다만 부르짖는 사람일 뿐이다. ‘오직’ 그러하여서 비록 아내와 딸애만 앞에 두고 신년감사예배를 드리는 일에서, 종일 혼자 있으며 별다른 소득도 없이 빈둥거리는 것 같으나 그처럼 교회를 지키고 그 자리에 머무는 일에서, 하필(!) 온전하지 못한 아이 하나로 씨름하면서 같은 말을 또 하고 같은 걸 또 일일이 챙겨 보살펴야 하는 일에서, 그래서 아무런 성과도 없는 듯 한 일에서, 그저 자신들 필요에 의해 왔다가 그만두면 그만인 아이들과 그 엄마들을 상대하는 진저리나는 일에서, 도대체 왜 우리는 이러고 있어야 하나 싶은 회의와 갈등을 입에 가득 머금고도!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리이다.’ 그 모든 일과 중 처음 ‘아침에’ 나는 또 기도하는 것이다. 누가 오든 몇 명이서 예배를 드리든 나는 설교 원고에 공을 들이고, 혼자 있으면서도 늘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으면서, 어떤 성과와 상관없이 아무리 저들이 몰상식하고 몰염치하다 해도 다만 우리는 우리 곁에 보내시는 저들 아이와 아이엄마들을 또한 마주하고 주의 이름을 위하면서! 발목이 아파 디딤발이 어려워 지팡이를 짚고서도, 돈이 쪼들려 교회 월세를 카드에서 우선 뽑아 제 날짜를 지키면서도, 했던 말 또 하고 소득도 없는 일을 챙기고 위해 돌보면서도 거기까지 주 앞에서.

 

우린 결코 '저것들' 앞에서 부르짖는 게 아니었다.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는' 그 자체로 예배이었다. 이는 전적으로 주의 섭리를 신뢰하기 때문이다. 당장 죽는다 해도 주가 이루실 것들에 대하여 두려워할 줄 알았던 히브리 산파들의 당당한 저항이 그 자체로 예배였다. 모름지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즉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함을 행하려는 게 곧 예배의 일상이 되는 거였다.

 

그러므로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시 88:1-2).” 하면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11).” 또는 “흑암 중에서 주의 기적과 잊음의 땅에서 주의 공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12).” 그러므로 우리는 확신하는 것이다.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