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전봉석 2019. 1. 3. 07:15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출애굽기 2:9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시편 89:1

 

 

족히 열 번은 넘겨 통화가 되었다. 아이는 여전히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짜증스럽게 누구냐고 물었다. 핸드폰이 없어 집전화로 통화를 하는 거였다. 그렇듯 집에 틀어박혀 열두 시를 훌쩍 넘겨서도 잠에 취해 있었고, 할 일이 없어 할 일을 찾지 못했고, 긴 하루를 그렇듯 혼자 있는 게 힘들어서 자꾸 늘어져 잔다고 하였다. 모든 병 중에서 무기력은 가장 고약하고 달콤한 것이다. 몰라요, 됐어요, 하는 말로 귀찮아하는 게 역력했으나 그럼에도 전화를 끊지 않는 게 기특하였다.

 

모든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서 전개된다. 죽여야 해서 물 위에 던진 아이를 물에서 건져 하나님은 ‘모세의 이야기’로 끌어가신다. 이제 스물다섯 살, 아이는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이 많다. 그런데 주체할 수 없는 무력감으로 몸은 비대해졌고, 과체중은 병적으로 여기저기 삐걱거리며 아팠다. 그래서 그런 건지, 그래서 그런 건지, 변명은 그렇듯 꼬리를 물고 악순환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여전히 우리는 ‘만물이 복종하지 않는’ 시대에 산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나 주를 멀리하고 부정하는 사람이나,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히 2:8).” 그러니 뭐라 하면 ‘그러는 선생도 다를 게 없지 않나?’ 하는 회의가 반감처럼 뒷덜미를 틀어쥐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이제 더는 전개될 이야기가 없이 모든 게 끝난 것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은 아이를 물에서 건지셨다. 그리고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출 2:9).” 언제 어떻게 새로운 전개를 맞을지 모른다.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분명한 건, 네 의지다. 당장 밖을 못 나오겠으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가족들이 모두 없을 때 집안일을 돕는다거나 하다못해 가족들과 앉아 식사를 같이 한다거나.

 

하긴 그게 안 되니까 저러고 있는 아이에게 나의 말은 하나마나한 소리였으나, 그럼에도 문제의식을 갖는 게 급선무였다. 스스로 느껴야 한다. 동기부여가 중요한데, 나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누구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는 어떤지 말해주고. 불쌍한 엄마를 생각하고 두 동생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보라고 일어주면서. 무엇보다 그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자신의 문제에 직면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렇듯 우리는 무능하고 무기력한 존재여서, 예수를 바라보자.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어쨌든 더 오래전부터 고질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와 문제의 연속이 오늘까지 이어지는 것이겠지만, 결국 어렵게 들어간 대학도 자퇴하고 간신히 정신과 약을 의지하면서 두문불출 무기력증에 사로잡혔으니.

 

답은 하나뿐이다.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자. 진정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 이를 아이에게 어찌 전하면 좋을까? 우리 사람은 그 자체로 악하다. 바깥의 무슨 요인으로 인한 게 아니라 우리 자체가 본질적으로 악하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약 4:1).”

 

이는 우리가 그 땅의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형질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 이에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셔야 한다(창 1:2). 그런데 하나님의 운행을 거절하고 거부하면서부터 우리는 더욱 악해진 것이 아니라 본래의 악한 형질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이의 마음은 혼돈하다.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이제 식상한 얘기가 되었다. 친구 누구의 자살, 그 사이에서 친구들과의 오해와 반목과 외면, 누적된 피해의식과 열등감, 거기다 결정적으로 한 여자 아이의 일방적인 결별이 공황을 촉발했고 급기야 오늘의 무기력에까지, 누적된 그 영혼의 피로감이 무기력증으로 누르고 있는 것이었으니.

 

그러는 동안 부모의 영향력은 전무하여서 아이를 잡아주지 못했고, 메마른 친구들과의 우정은 그저 같이 노는 것 외에 의지의 대상이 못 되었으며, 그 안에 뿌리박힌 종교에 대한 불신은 '선생'의 조언과 목회와 살아가는 이야기가 별로 감동을 주지 못하였다. 이 모든 게 아이의 기질과 고질적인 성향 때문인 것 같으나, 사람은 본래 구제불능의 존재였다. 저 아이만 그런 게 아니다. 혼돈과 공허가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흑암 중에 있었다. 네, 하고 마지못해 대답하는 아이 때문에 자꾸 울컥울컥하였다.

 

도저히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어서,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아이가 돌이켜 문제를 의식하고 주의 도우심을 바라지 않는 이상에는. 그러니 나는 그렇게 당장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부터 하자. 글을 한 줄 쓰고, 자기 방을 좀 정돈하고, 책장을 정리하며 버릴 건 버리고 안 읽고 있는 책을 먼저 읽으면서. 통화 중에 귀가한 중1 막냇동생에게 살가운 말 한 마디부터 시작하자고.

 

그런들 만사가 귀찮아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 실제 이 일은 영적인 싸움이라. 내가 막연히 격려하고 위로한다고 될 일도 아닌 것이다. 정해놓고 통화부터 좀 하자. 어땠는지 묻고, 조만간 지하철을 못 타는(!) 아이를 대신해서 내가 군포로 가든지. 중간 어디에서 만나 식사라도 같이 하자. 자꾸 하려고 할 때 조금씩 할 수 있다. 이런 소릴 하면서도, 그게 실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나는 잘 알고 있었으니, 이 일은 단지 우리의 의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무엇보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나의 권유를 농담으로나 듣고마는 것에 대하여, 그 비치지 못하는 저의 흑암 중 깊은 공허를 어찌 자신인들 다룰 수 있겠나. 어쩔 수 없이 집전화로 전화를 걸어 아이와 통화를 해야 하는데, 거의 대부분 자기 방에 처박혀서 잠만 자는 형국이었으니. 그래도 난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시 할 뿐이다.

 

그리 말해주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저의 안에 있는 불순종의 영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수 있을까? 사람은 본래 구제불능이라. 나나 너나 다를 바 없는 존재였으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 없이 행복은 없다. 성공도 출세도 많은 부와 명예는 얻을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안에 감사와 충만한 기쁨은 불가능하다.

 

예컨대 여섯 시를 넘겨 늘 그렇듯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근무할 때 힘든 점은 없는지, 추운데 견딜만한지, 나는 또 늘 같은 말로 묻고 조바심 내며 아이와 카톡을 하거나 통화를 한다. 그럴 때면 아이의 뜬금없는 대답, 오늘도 기도했어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렸어요. 모두가 감사했어요. 하고 돌아오는 대답이 내게는 은혜였다. 이렇게 저렇게 힘든 여건 가운데서도 그처럼 주 앞에 건실할 수 있다는 게 복이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우리로 주께 영광을 올리게 하신다.

 

부모는 체념하고 아이를 강보에 싸서 광주리에 담아 나일강에 버렸다. 스스로 안고 씨름하며 애지중지하였던 것을, 더는 그리할 수 없을 때 다음 이야기는 주께서 전개하신다. 모든 우연과 우연이 동원되고 저마다의 기질과 형질이 발동되어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창 2:6).” 바로의 딸로 그 화려함의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어떤 감정을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나.

 

이 한 장면에 동원되는 숱한 이야기와 이야기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것을 본다. 아이의 지금이 결코 끝난 이야기가 아닐 것임을 확신한다. 며칠 전부터 시도하였던 통화가 새해 들어 마치 우연처럼 연결이 되고, 잠결에 짜증스런 목소리로 퉁명스러워하자 잠 좀 깨고 전화해라, 하고 나는 일부러 시간을 두었다. 그냥 그렇게 다시 전화를 안 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이어가실 이야기다. 다음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뤄 가실 것을 안다. 자주 통화하자, 하고 전화를 끊으면서도.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히브리 기자의 전개를 추론할 수 있었다. “예수를 바라보자.” 다른 길 없다. 애가 싫어하고 거부해도 어쩔 수 없다. 내가 가진 것은 그의 이름뿐이다.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아이와의 통화를 전후하여 읽었던 말씀의 구조가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와 같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모세 이야기 속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마주한다.

 

곧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그리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백성이라면, 반드시 그리 행하실 주의 일에 의심할 게 없다. 다만 끝내 거절하고 외면하고 부정하는 경우에 대하여는,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이것이야말로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내 이야기로 연관짓지 않으실 것임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6:15-17).” 끝내 주의 얼굴을 가리며 눈을 돌려 부인하는 것은, 무기력이 아니라 보다 강한 죄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또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입에 머금고 음미한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시 89:2).” 우리는 그와 같은 약속의 언약을 붙드는 사람들이다. 결코 우리는 오래지 못한다.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47).” 하면 두신 날 동안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이야기'에 '나의 이야기'는 전개되는 것이다. 이에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52).”

 

고로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