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전봉석 2019. 1. 12. 07:16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

출애굽기 11:10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시편 98:3

 

 

‘합당하도다.’ 하는 말씀을 붙들고 설교 원고를 작성하면서도 내내 동감하였다.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한 주간 그리 붙들려 있던 말씀이었다. 전도서 6장 말씀과 대비하여, 과연 이 허무한 인생 앞에서 하나님의 합당하심을 공감할 수 있을까? 동의할 수 있을까? 그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왜? 왜 하필? 우리에게 드는 의문점이 어디 한두 개인가?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전 6:3).” 차라리 그럴 바엔 나지 않은 게 낫고 낙태된 자로 세상 빛을 보지 않고 간 것이 더 평안함이라 생각하였다. 결국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6).”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합당하심 앞에 수긍하고 순복하며 사는 인생이어야 한다는 데 방점을 찍고 나름 설교 원고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아이와 어찌어찌 연락이 닿았다. 어느새 서른하나 어엿한 주부가 되어 있었다. 서로 안부를 묻다 같이 글짓기를 배웠던 시절, 그러니까 아이들이 초딩 5, 6학년 때하여 중2 때까지였으니. 그때 나는 하나님과 등지고 살던 때였다. 같이 하던 아이 중에 하나는 내게 늘 잔소리하듯 담배 끊으시라, 신학 다시하시라, 목사님 되실 분이!

 

하면서 볼 때마다 은근히 맹랑하였다. 날 위해 기도한다느니, 특별새벽예배를 나갔다느니, 금요 철야예배 때 기도 제목으로 올렸다느니. 아이가 연대 논술을 준비하면서도, 숙대에 들어가 로스쿨을 준비하면서도 볼 때마다 그처럼 채근하듯 위하여 기도한 덕분이었을까? 신대원에 들어가고 나는 아이에게 연락하여, 네 기도가 이루어졌다며 서로 깔깔거렸다. 연애를 하고 스위스 제네바에 본사를 둔 무슨 국제법률기구에 수습연구관으로 뽑혔다느니. 그렇듯 서로의 근황은 기도와 함께 이어져왔었다.

 

목사 안수를 앞두고 있었을 땐가, 흉부에 주먹만 한 종양이 생겼다고 했다. 느닷없이 아이의 인생은 어지러워졌다. 수술도 할 수 없는 부위라 항암치료를 시작하였는데, 종종 그 고통을 알려오며 기도를 부탁하였다. 3개월밖에 못 살 거라는 아이는 기도로 견뎌냈고, 종양은 더 자라지 않았으며 기력을 회복한 뒤 선교 일에 열중하였다. 그때 글방에 들렀을 때 짧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목사 고시를 두 번 낙방하고 여전히 주춤거리고 있던 내게 아이는 여전히 잔소리하듯 뭐라 했었다.

 

그렇게 5년을 활발히 활동하였고 종종 세계 곳곳에서 근황을 알려오던 것이, 다시 항암치료를 시작하게 됐다며 기도해달라고 했던 게 2년 전이었다. 종종 문자로 근황을 알리고 안타까움을 더하다 연락이 끊겼었다. 문득 나는 그 아이 소식을 물었고, 얘도 결혼하고 뭐하고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며 알아보겠다며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였다. 오후께 문자가 들어왔다. 그 즈음 아이는 하늘나라로 갔다는 것이다. 그럴 것 같다고 짐작하고 있을 때와 실제 그렇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다르다.

 

갑자기 먹먹해져 자꾸 울컥거렸다. 여느 때보다 일찍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을 하며 마음을 달랬다. 그러면 그럴수록 예전 생각이 더욱 선명해졌다. 아이 엄마가 유난히 친절했던 것, 그때마다 기도로 마음으로 응원하고 후원했던 일. 아이의 남다른 열정과 그 신앙의 명쾌한 속보하며. 낮 동안 말씀을 준비하며 그 말씀의 의미로 심취하였던 마음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결국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나? 왜 하필! 끊임없이 이는 마음의 소요는 나를 우울하게 하였다.

 

우리는 남다른 안목을 가졌고, 참 행복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씀 준비를 하였다. 더 이상 우린 세상에 썩어질 것들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증거할 거였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이와 같은 말씀이 순식간에 추상적으로 다가왔다. 이 보배롭고 귀한 약속을 위해 우리가 세상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셨어야 했을까? 벌써 2년 전이면 스물아홉 때였다. 한 번 가볼 걸! 좀 나으면 글방에 오겠다는 아이의 말에 그러려니 하고 말았던 게 후회가 되었다. 결국 우리로 종의 영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나는 마음이 너무 어려웠다. 가만있으면 자꾸 눈물이 났다. 아내가 나와 같이 동네를 한 바퀴 걸었다. ‘불금’이라 그런가, 와글거리며 오가는 그 또래 아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아내에게 말해주다 자꾸 울컥하였다. 입을 꾹 다물고 시무룩해졌다. 어떤 빚진 마음이 들었다. 아이엄마에게라도 연락을 좀 해야 할까? 혼자 궁싯거리다 그러지도 못했다. 나는 어쩜 평생을 엉거주춤하며 사는 위인인가보다. 아이의 맹랑하고 저돌적인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결국 자신의 기도 응답이라며 너스레를 떨던 모습도 기억났다. 어떻게 이러실 수 있나? 정말 이 방법밖에는 없는 것이었을까? 내 안에 이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게. 인생 참 너무 허무할 뿐이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사 40:6-7).” 너무 청아하고 아름다운 고백이다. 그렇듯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런 가운데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을 묵상한다. 내 안에 이는 슬픈 감정이 더욱 주를 바라게 하는 것이다.

 

이내 듣는 자는 듣고 보는 자는 본다.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출 11:10).” 철저하게 하나님을 외면하는 자리에 들지 않게 하시려고, 나로 한참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자처럼 굴 때 내 곁에 두셨던 아이였다. 담배 좀 끊어요! 목사 되실 분이 언제까지 그러실 거예요! 하며 뭐라 꾸짖던 소리가 어찌 그냥 아이 목소리였겠나?

 

내게 은혜가 많다. 내가 빚이 많다. 문득 주의 품에 있을 아이를 생각한다. 여전히 나를 응원하며 위하여 기도하고 있을 모습이 그려진다.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시 98:3).” 이내 이 모두를 이루시는 과정에서 아이가 먼저 걸으며 들려주었던 잔소리와 기도의 덕이다. 덧없는 인생을 덕 있는 삶으로 사는 길이란,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마 25:21).”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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