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인도하여 내셨더라

전봉석 2019. 1. 13. 07:24

 

 

 

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무리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

출애굽기 12:51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시편 99:9

 

 

무려 430년. “바로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무리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다(출 12:51).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었다(37). 그 가운데 “수많은 잡족”이 섞여 나왔다. 여전히 속박 중에 있는 감정의 경우도 그러하여서,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시 99:1).” 주의 통치와 다스림이 절실하다.

 

이때에 주를 부르는 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돌아오라. 용서하시리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7).” 이처럼 말씀을 주목하여 붙드는 일. 나를 향한 주의 생각을 아는 것.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묵상이란 이와 같이 말씀을 아로새겨 마음에 심는 일이다. 이를 온유함으로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아이가 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만사가 귀찮고 기분은 축축 늘어졌다. 토요일 오전은 평소 그렇듯 고즈넉하였고, 마음은 쳐져 자꾸 시선을 떨구었다. 정오가 다 됐을 쯤 아이가 토요 근무 후에 회식이 있다며 못 올 것 같다고 연락을 주었다. 딸애와 아내는 늘어져 쉬고 싶다고 해서 여전히 혼자 글방에 남았다. 내 안의 오만가지 감정이 ‘수많은 잡족’ 같이 뒤엉겨 마음을 어지럽혔다. 누구와 이야길 좀 하고 싶기도 하고, 어딜 좀 갔으면 싶기도 하고, 그러다 모든 게 귀찮아서 건성으로 책장만 넘기며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하루였다.

 

여전하여서 어쩌면 죽는 그날까지 노예 아닌 노예로 종살이처럼 산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에 와 닿지 않고, 가슴은 뜨거운데 삶으로 이어지질 못하면서. 모두는 죽기 전까지 같이 쓸려나온 잡족과의 사투를 벌이는 영혼들이다. ‘따귀 맞은 영혼’처럼 어안이 벙벙하고 마음은 축축 쳐져 뭘 해도 만사가 귀찮고 성가시기만 한 것이다. 굳이 그럴 게 뭐 있어?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은 마음을 어쩌지 못하였고 그리 마음은 저 혼자 쩔쩔매었다.

 

그런 내게 주님은 말씀을 보내신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몸을 일으켜 이처럼 말씀 앞에 앉을 때, 이러는 나의 감정들이 얼마나 부질없고 모순된 지 알 것 같다. 더는 어쩔 수 없는 것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라.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더욱 주를 바랄 수밖에. 누구를 찾고 친구를 만나 어디를 간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무심히 글방 안을 서성거리다 또는 창밖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물끄러미 시선이 닿지 않는 어느 지점에서 나는 울고 있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우리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시온을 생각하며 우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4).”

 

자꾸 죽은 아이 생각을 하였고, 이를 떨쳐내려고 다른 생각을 하다보면 기진하였다. 참 오래 된 이야기처럼 까마득하였다. 그런 시절이 있었고, 그런 시기에 내 곁에 두셨던 아이에 대하여. 그 엄마들의 친절과 아이들이 맹랑하고 발칙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듯하였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 더 심한 우울감이 나를 쥐고 흔들었다. 그럼에도 나를 여기까지 불러내시고 여전한 ‘잡족’과의 결투를 벌이며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시는가.

 

살면서 사는 일에 지칠 때. 생각하는 일과 마음 쓰는 일로 더욱 어지러운 경우. 전도서의 말씀은 여기가 어디인지, 왜 그처럼 복잡하고 어지러울 수밖에 없는지를 알게 한다. 설교 원고를 다시 읽으며 그 말씀이 나를 두고 하시는 것을 듣는다. 결국은 ‘예수를 바라보자.’ 왜냐하면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그래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2).” 다른 더 좋은 수는 없다. 살면서 사는 일에 피곤하고 낙심할 때,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는 것.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하기를 여러 번 하던 말들을 없앤다. 아이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자꾸 마음은 까부라져 저 혼자 들썩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마침 성경공부를 왔어야 하는 아이가 회사에서 회식이 있다며 못 오면서, 더욱 축 쳐지던 마음을 가눌 길 없어 늘어져 있던 날인데. 누가 나를 붙들어줄 것인가?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신기한 건 천사를 붙들어 주시는 게 아니라 바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다.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이 구원의 상속자는 천사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히 1:14).”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마음은 진정이 되고 내가 지금 무얼 해야 하는지를 알겠다. 마음은 저 혼자 그러는 것이어서, 그러려니 하고 말아야지 휘둘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그래서 나에게 최소한의 안전그물망은 아침에 이처럼 묵상하는 시간이다. 말씀이 촘촘하게 나를 엮으신다. 전날에 주체할 수 없던 마음까지 갈급함으로 쓰인다.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죽음을 가르치는 사람은 삶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는 말을 읽은 것 같다. 목사는 물론이고 선생으로 또는 어른으로 사는 일이란, 그래서 잘 사는 일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죽음을 일깨우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마치 죽음이 없을 것처럼 사는 사람들을 향해 참살이의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려고. 전날에 그처럼 마음을 들볶던 생각과 생각이 그런 것이었나. 우리는 구원을 상속으로 받은 사람들이다. 천사가 아니라 우리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그러니 ‘예수를 생각하라.’ 모든 문제의 키워드였다. 결단코 문제는 문제로 그치지 않고 어찌 풀려고 해도 풀려나지 않는다. 좀 나아진 것을 문제 해결로 볼 수 없다. 결코 이 땅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동안, 베벨론 강가에서 우리의 눈물은 정당한 것이다. 시온을 생각하며 흘리는 눈물이 헛되지 않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성품의 문제였고, 하나님이 이뤄 가시는 구원의 일로 가장 선하게, 또 안전하게, 확실한 길로 인도하시는 과정이었다.

 

왜냐하면 여전히 내 안에는 수많은 잡족이 있어, 앞으로도 사사건건 주를 배척하고 불순종의 길로 이끌려고 할 것이다. 죽음이 다하는 그날까지 그와 같은 사투는 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의 증거는 예수시다. 말씀 붙들자. 말씀이 붙드시는 것은 천사가 아니라 오늘 우리다. 말씀을 잊을 때,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그러니 낙심하지 말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어쨌든 출애굽은 이루어졌다. 비록 수많은 잡족이 한데 나왔으나, 것도 문제가 아니다.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시 93:2-3).” 주가 이루실 것이다. 그러했던 것처럼,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5).”

 

고로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8).” 그러므로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