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수송아지를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레위기 4:4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시편 129:2
죄를 속죄 받기 위한 세 가지 필수요건이 나온다. 하나는 죄를 전가할 대속물이 있어야 하고, 둘째는 그 대속물에 안수하여 죄를 전가해야 하며, 셋째는 그 대속물이 반드시 죽어야 한다. 우리 죄를 대속하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의 죄를 대속하려 십자가를 지셨다. 머리로는 다 아는 말씀이라 감흥이 없는가. “그 수송아지를 회막 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레 4:4)” 말씀 앞에 앉는다.
주인이 건너와 일이 잘 처리되었다며 안심을 시켰다. 모든 게 그리 순탄하게 지나갔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이젠 평온함으로 주를 바랄 줄 알게 하신다.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실제 삶으로 이를 증명하신다.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전 8:1).” 그러는 중에 설교 본문을 찾아 묵상하는데 그 말씀이 새롭다.
종종 나는 가만있는데 내게서 하나님의 얼굴이 보인다. 이는 인위적인 표정관리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하나님이 내게 두시는 증거다. 나는 내 얼굴이 낯설고 때론 잘 모르겠는데,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보면 서로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듯하다. 그냥 좋은 인상이 있다. 생김새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에 비추시는 빛이라. 사장이 먼저 사정을 말하고 일을 해결하느라 분주하다 나를 달래며 나가지 않기를 원하는 게 신기하였다. 그게 단지 내가 좋아서이겠나? 하나님이 계신 빛이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뭐래도 숨길 수 없는 얼굴 같다. 얼굴에 다 드러난다. 스치듯 보았을 뿐인데 마음이 설레는 어떤 인상,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에서 확실히 티가 나는, 누구의 얼굴처럼. 그래서 우린 감히 누구의 역할을 뭐라 하지 말아야한다. 저는 다 주가 쓰심에 있어 세우신 것이나, “바울이 이르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리를 비방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행 23:5).” 함부로 가타부타할 얼굴, 권위는 없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사람을 각기 그 자리에 두시는 덴 미처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정하심이 있다. 감 놔라 배 놔라 할 게 아니다. 오히려 관용하고 온유함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다.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1-2).”
자신과의 화목이 서로의 화목을 도모하게 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 5:12-13).” 설교 원고 본문을 잡고 성경 구절을 찾아보면서 새삼 나의 나 된 것에 대하여 그 의미와 권위가 하나님께 있음을 생각하였다.
곧 내가 누구를 대하는 일, 또는 누가 나를 마주하는 일에 있어서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활동이 계시다는 것. 그래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내가 누굴 위하고 대하는 일에서도 같다.
누가 나를 대하는 데 있어서도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싫든 좋든 저에게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목사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사람이다. 함부로 굴지 못하게 해야 하고 누구에게든 함부로 여겨져서도 안 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평소에 단련되어야 하는 것이겠다. 이럴 때 나는 늘 나다나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어니스트를 생각한다. 늘 그의 마음에는 전설처럼 이어져 내려오는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이가 찾아올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는 중에 자신이 어느새 그 얼굴을 닮은 사람이 되었다는.
말투며 행동거지며 사람을 마주하는 일에 있어서 이제는 내가 나만을 위한 나로 사는 게 아니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말씀 앞에 새삼 그 실제가 무엇인지 묵상하게 된다. 저가 나를 위하는 게 아니다. 나에 대한 호감으로 또는 동정으로 그리 대하는 것도 아닐 거였다. 내 뒤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라. 은연중에 저도 아는 범접할 수 없는 사실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4).” 가타부타 내 주장을 하기에 앞서 저의 사정을 이해하고 할 수 있다면 교회 간판을 떼어주고 고유번호가 적힌 등록증을 치워주는 일 정도야 못할까? 그런다고 교회가 교회가 아니겠나. 그리하시라, 괜찮다, 마음 쓰지 마시라, 하는 나의 배짱은 전적으로 나도 모르는 마음이었다. 내 안의 하나님이 그리 두게 하시는 게 아니었겠나? 어려움에 처한 게 저인지 나인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말씀 앞에 이끌리다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그러면서도 은연중에 인도하심과 이끄셨음을 눈치 챌 수 있다. 가령 성령 충만이란 것이 매번 매순간 뜨겁게 역사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 중에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싱겁고 늘 같은 맥락의 것처럼 이어지고 되풀이 될 뿐이어서 어쩔 땐 본인조차 이를 분간하지 못할 때도 있다. 한데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전 8:5).” 어떤 일이 터졌을 때 분명해진다.
같이 동동거리고 안달복달 죽 끓듯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누가 뭐래도 도우시고 이끄시는 주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한다고 해서 되는 일도 아닌 것이고, 의연함이란 의연하자고 해서 되는 게 아니어서 그러고 보니 어느덧 의연하였다. 그만하면 태평하였고 평온하였다. 오히려 내가 나서서 전전긍긍했어야 할 일을 주인 사장이 나서서 다 일처리를 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는 들으며 고마움을 나타내는 것밖에. 그러는 중에 분명한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그렇게 우리의 마음은 다소 보폭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해도,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전 10:2).” 엄연히 다른 곳에 선 사람들이다. 그래서 성경은 엄히 이르신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왜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깨어 있으려 해야 하는지. 그래서 묵상을 하고 기도를 게으르지 않으며 어떠하든 하나님을 우러러 주의 도우심을 확신하는지.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자칫 무슨 일이 터졌을 때 본래의 속성에 이끌려 돌아가기 일쑤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알기 전보다 더 못한 심령으로 살아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보면 왜 저처럼 저항하는가, 저가 예전에 알던 사람이다. 나름은 믿었던 사람으로 주의 영광을 찬양하였던 이다. 아이엄마가 유독 교회를 싫어한다싶으면 영락없다. 처녀 적에 예수를 믿던 사람이다.
그러니 평소 우리가 깨어 있어 주를 바라는 데 있어 그 경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언제든 호시탐탐 노리는 대상은 아예 예수를 부정하고 멀리하는 사람이 아니고 주를 바라고 의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성경은 누누이 이르신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에이 설마, 할 때 낡아 챈다. 마음은 더구나 쉼 없이 요동치는 법이어서 며칠 동안 이어지던 나의 두통은 그 출처가 불신이었다. 염려와 근심이었다. 어쩌나싶은 그래서 내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할 건 없고, 할 수 있는 능력은 안 되니까 혼자서 격세지감에 사로잡혀. 이어지던 두통이 이를 깨우치게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엡 4:17).” 언제든 혹, 하는 이 마음의 가엾음을 어쩌면 좋을까? 그래서 더욱 주를 바란다. 애통함이 온유함을 돕는다. 심령이 가난해지는 일은 지난하도록 지루하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전 8:9).” 그럼에도 우린 할 수 있다.
내가 나를 주장하는 해로움을 겪어봐야 비로소 그게 다 소용없다는 걸 안다. 이 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그들이 내가 어릴 때부터 여러 번 나를 괴롭혔으나 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시 129:2).” 어쩌면 기질이고 성격이 되어 괴롭힐 정도이지만 그럼에도 내 안의 영이 나의 나 된 점을 이기게 하신다. 때론 그 등살에 “밭 가는 자들이 내 등을 갈아 그 고랑을 길게 지었도다(3).” 괴롭기가 이를 데 없으나,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4).” 이와 같은 찬양과 말씀 앞에서 안도하게 하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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