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전봉석 2019. 2. 15. 07:06

 

 

 

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

레위기 5:6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시편 130:1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가. 성물에 관한 죄, 계명을 범한 죄, 사람 사이의 범죄 등으로 여전히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면 온통 우리 삶이 피비린내가 진동을 할 것 같다. “그 잘못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속죄제를 드리되 양 떼의 암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끌어다가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제사장은 그의 허물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라(레 5:6).” 그런 가운데도 만일 힘에 그에 미치지 못하면 비둘기로, 힘이 그에도 미치지 못하면 고운 가루로 속죄제물로 삼을 수 있었으니.

 

“제사장이 그가 이 중에서 하나를 범하여 얻은 허물을 위하여 속죄한즉 그가 사함을 받으리라 그 나머지는 소제물 같이 제사장에게 돌릴지니라(13).” 말씀 앞에 앉아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게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 새삼 귀하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감격과 같아서 하나님의 행사를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으나 그 사랑은 분명하게 와 닿는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사 46:10).” 주가 이루신다. 이는 또한 주가 기뻐하시는 일이다. 곧 내가 내 속엣 얘기를 부르짖어 고할 수 있는 것.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시 130:1).” 그럴 수 있는 사이여서 그럴 수 있는 사이로 알게 하심이 놀랍다.

 

중3 아이가 어쩌면 이제 수업이 마지막일 수도 있어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주었다. 왕따인데 왕따인 걸 알면서도 속절없는 아이여서 것도 지나고 보면 유익하기를 위해 기도하였다. 중1 아이와 서로 돈을 모아 쌀국수를 사와서 나눠 먹었다. 그렇듯 아이들 사랑방이 되어주는 게 또한 나의 역할이기도 하였다. 중1 아이가 부쩍 이성에 눈을 뜨고, 강한 부정은 새삼 끌리는 끌림을 감추고 있었다. 비록 스쳐가든 또 한동안 함께 가든, 중3 아이가 기도를 하고 같이 국수를 먹었다. 자고로 음식을 나눈다는 건 귀한 사이다.

 

어쩌면 나의 까칠한(?) 태도가 이별에 늘 익숙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약사 애는 늘 내게, 쌤은 까칠한 사람이야! 하고 엄포를 놓듯 말한다. 차갑고 냉정하다는데 그건 내가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부정될 수 있는 게 아닐 거였다. 어쩌면 그 모든 게 역설적이다. 나는 오래 곱씹어서 고약하다. 잘 지내, 하고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을 하고 돌아서는데 마음이 찡하였다. 정들면 지옥이다. 늘 내겐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라, 어쩌면 그럴 바에 정 주지 않으려고 그래서일까?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전 8:15).” 그런 거보면 아이들을 가까이 한다는 건 늘 이별을 전제로 하는 일이겠다. 어느새 훌쩍 커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스치듯 왔다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떠난 아이를 두고 마음에 어려워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아이를 품고 씨름할 수도 없다. 다만 지금, 내게 두시는 시간을 함께 가는 것으로 이보다 더 귀한 일이 없겠다. 새로 중학교에 올라가는 아이가 초딩들과 같이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슬그머니 초콜릿을 내게 주었다. 뚱하니 말도 없고 그저 재미없이 오나 싶었는데, 언니들이랑 같이 나누어드세요. 하고 건네는 아이의 마음이 가상하였다. 또 누군가는 지나가고 누군가는 다가오는 일이어서, 같은 일에 시달리면서도 마음이 익숙하지 못한 것은 똑같다.

 

혼자 끙끙 앓듯 나는 자꾸 누구를 그리워한다. 지나고 난 뒤에야 마음이 선명해지는 것이다. 그러할 때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니(2:26). 온전히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저 아이 하나도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겠다. 결국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는 그냥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러므로 얻는 ‘하나님의 얼굴’이 있다.

 

상대적으로 내 얼굴에서 사나운 것이 변하여지는 일이다.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전 8:1).” 말씀처럼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알겠나. 누구를 만나고 헤어지고, 같은 시간대를 동행하다 어긋나기를 숱하게 하면서. 하나님은 지혜를 통하여 우리 얼굴에 흔적을 삼으신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근심하나 기뻐한다는 역설의 미학을 나는 사랑한다. 싫으나 좋고, 나쁜데 괜찮고, 바라지 않는데 견딜 수 있는, 어쩌면 모든 굴레의 이치가 그런 게 아닐까?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일이 내게 유익한 것은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어찌 말씀을 되새기고 음미하여 그 깊이와 너비를 알고자 했을까? 하면 오늘 나로 목사로 두시는 덴 참으로 귀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중3 아이가 식사 기도를 해주어 같이 기도하면서, 왕따인 아이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못했음을 미안하게 여겼다.

 

여전히 ‘혼코(혼자 노래방)’를 가고 들어앉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 드는 아이에게 부디 그 신앙을 잃지 않기를. 엄마도 더는 교회에 열심을 다하지 않고 아빠는 일로 엮여져 교회를 열심인 것에 대하여, 아이는 순수하게 주의 은혜와 사랑을 누리면서 살 수 있기를. 그러할 때 반드시 우리 생 뒤의 생에서,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나는 말씀 앞에 확신한다.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8).” 결코 우리 의지나 노력에 의한 게 아니었다. 이래저래 우울할 수 있는 날들인데 별로 우울할 것도 없는 나의 덤덤함이 감사하였다. 받아들임이란 그리 더하신 이의 풍성하신 사랑을 이미 아는 까닭이다. 아내가 딸애는 다음날부터 있을 3박4일 일정의 필리핀 여행 준비로 분주하였다.

 

돌아오는 토요일 아들 놈 졸업이라 그리 된 것인데, 자꾸 같이 못 가는 내가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아니라 해도 우습고 그렇다 해도 우스운 일이었다. 외롭고 쓸쓸해해도 우습고 안 그런 척 해도 우스웠다. 그러니 그냥 그러려니, 나는 오히려 중3 아이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더는 이어질 수 없는 어떤 만남에 대해 서운해 하였다. 퇴근 후에 아이는 잘 귀가를 하였는지, 전날 머리가 아파서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못 온 것이 마음에 걸려.

 

그런 것이다. 때론 그런 내 마음이 내 마음 같지가 않아서 낯설다.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전 8:12-13).” 더러는 나의 이해와 판단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하여, 주께 맡기라.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왜냐하면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시 22:10).” 이를 앎이 귀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 나는 이 속담을 사랑한다. 어쩔 수 없는 것을 두고 자꾸 개선하고 뭔가 꾸려가려 할 때 도리어 행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더는 못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감히 생각하지만 이 속담이 성경적이지 않겠나! 안 되는 걸 되게 하려는 것보다 될 수 있는 것에 충실함이 옳다. 부러워할 것도 속상해할 일도 아니다.

 

오히려 내 안에 두시는, 더 관심이 가는 일들이 있었으니. 종종 그게 신기할 정도이다. 이 와중에 저 아이가 무슨 상관인가, 싶은. 그런데도 그리 마음이 쓰이고 그리 관심이 기울게 하심은 말 그대로 내가 하는 일이 아니지 않겠나, 싶은. 떠나는 중3 아이 대신 새로 올라오는 중1 아이를 마음에 두게 하시려고. 곁에 두시는 그저 한 영혼으로 나의 전부보다 먼저 와 닿게 하시는 일이어서.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말씀을 이렇게 가져다 읽는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게 그저 어쩔 수 없어 숙명론자로 산다는 소리가 아니라, 그리 두시는 일로 ‘이 같은 마음을 품어’ 주를 경외하는 일이지 않겠나? 안 되는 걸 자꾸 되게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는 것보다 그래서 두신 새로운 일을 감당하면 되는 일이어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오히려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이보다 현명했을 수도 있다. 세상적으로는 저가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취했던 행동이 가상할밖에.

 

그러나 주님은 저를 꾸짖으셨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것이다. 그게 나에게 두신 일이라. 아이를 대하고 마주하는 일이 또 스치고 지나가면 새로운 아이가 주어지는 것이었으니. 하나이면 하나로, 둘이면 둘로, 다섯이면 다섯으로. 두신 날을 묵묵히 주의 것으로 사는 일이 복된 것이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전 8:16-17).”

 

어찌 감당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는,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시 130:2).” 다만 주께 아뢸 뿐.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3).” 양을 드릴 형편이 못 되니 비둘기로, 비둘기로조차 채울 수 없는 지경이라 고운 가루로.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4).” 오직 이 모든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을.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