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전봉석 2019. 2. 16. 06:18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

레위기 6:7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시편 131:1

 

 

 

일찍 눈을 떴다. 인기척이 없는 집에는 가전제품이 돌아가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받아들임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그 자세를 바로 일깨우신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어쩔 수 없어서, 그저 수동적으로 체념하는 게 아니다.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곧 이는 매우 의지적으로 주어진 나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를 가져와 오늘 말씀을 다시금 되새김질 하면, 그럴 수 있는 것이 주를 바라기 때문이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 다른 그 무엇, 나의 요동치는 감정까지도 개의치 않는,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그럴 수 있는 것이 그럴 수 있는 능력이 되어서가 아니라 그래서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는 중요성을 분간하게 하는 것이다.

 

이때에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레 6:7).” 어째서 우리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을 수 있는지,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말씀은 이처럼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허물의 사함은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었다.

 

말씀 앞에 앉아 이와 같은 이끄심에 주목할 수 있는 것이 은혜다. 영광이다. 하나님의 나라다. 어떤 서러움이나 그리움이나 외롭고 쓸쓸함이 더는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들로 휘둘리고 싶지 않은 ‘아름다운 덕’을 지키고 선포하기를 더욱 바라기 때문이겠다. 그렇게 아내와 딸은 필리핀에 아들놈 졸업을 위해 여행을 떠나고 혼자 글방에 앉아 설교 원고를 다듬고 책을 읽고 누구와 통화를 하고 어떤 이의 방문을 받고 하는 나의 일상은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셨다.

 

엊그제 조그만 소동이 있었다. 교회에 세를 준 문제로 주인은 사업자금으로 융통했던 돈 얼마를 조기 상환을 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데 그것이 일 년에 한 번씩 되풀이 되는 문제라면서 걱정을 하였고,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해야 하지 않겠나싶었다. 마음이 심란하여 점심을 먹고 산보하듯 둘러보다 인근의 어느 아파트 상가 1층과 3층을 보았고, 대충 시세를 묻고 왔었다. 그런데 다음 날 주인은 일이 잘 처리되었다며 괜히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고 하였다.

 

계약 기간이 일 년은 더 지난 터라 나가라 해도 되고 나간다 해도 되는 문제인데, 저에게 두시는 마음 씀이 저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교회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있는데 어제 오전에 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엊그제 보고 온 상가 3층 주인이 우리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는 그런 일(?)이면 월세를 받지 않고도 세를 줄 수 있다고 했다나.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잘 해보면 뜻하지 않게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며 말을 전해왔다.

 

혹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대충 듣기로 열다섯 평인데, 보증금 2000에 월세 70으로 내놓았다는데, 부동산 여자가 어떻게 말을 전하였기에 주인이 그처럼 호감을 보이는가싶었다. 부동산 사장도 교회를 다닌다는 소리에 우리 글방과 교회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기는 했는데. 순간 마음이 감동을 하였으나 거기까지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말이 그렇다는 소리지, 공짜로 세를 준다는 말에 덥석 가보겠다고 하는 것도 아닌듯하였다. 여기 주인도 나름은 한 달에 10여만 원 이상씩 되는 관리비를 후원금 명목으로 받지 않고 있는 실정인데. 그래서 정중히 거절을 하였다.

 

일련의 사건을 접하면서 나는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일이 어떠한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얄팍한 나의 계산이나 당장의 어떤 셈으로 움직일 일이 아닌 것이다. 이는 나의 기지도 아니고 판단에 의한 것도 아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신다는 데 전적으로 의뢰하는 것뿐이다. 어떻게 나의 영혼이 고요하고 평온할 수 있을까?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그럴 수 있는 것은 어머니의 품을 이제는 아는,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여기든 거기든, 내가 주도해서 옮기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곧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조금은 쓸쓸하고 우울하고 서럽고 또한 구차스럽기도 한데, 그것은 또한 내 몫의 십자가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시려는 데 주가 두시는 것이라. 이로써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것도 그렇고 사람은 본래 그렇게 선하거나 독특하지(?) 못하다. 부동산 여자 말로는 그쪽 주인이 서울대 나온 노인으로 돈에 여유가 있단다.

 

특이하여서 말씀만 잘 나누면 거저도 있게 하실 거라며, 왜 미적거리는지 나의 사양을 이상하게 여겼다. 자신도 교회를 다니지만, 목사님 참 좋은 기회인 것 같아요! 하면서 중개를 하는 것인데, 우선은 지금 있는 주인의 마음 씀을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저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사람을 그리 선하게 보지 않는다. 저가 믿는 사람이어서 그쪽 주인이 주의 뜻을 따라 그리하는지 누가 알겠나하지만, 말 그대로 그걸 누가 알겠나? 내가 아는 건 하나님의 주도하심이다. 만일 그렇다면 그쪽 주인을 보내서라도 데려가실 거였다. 그리 설명한 건 아니지만 그리 이해하고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고 말하였다.

 

즉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일련의 상황이 뭔가 스스로 꾀하여 간증이 될 수 있는 나만의 독특한 체험이고 확신이 될 수도 있었겠으나 그렇다 해도 우리가 하는 일은 그것을 전파하는 게 아니다. 묘한 수, 어떤 기이한 일, 참으로 신묘한 것이 복음을 대신할 수 없다. 어떠해도 간증은 그저 조금의 유익일 뿐 그것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저이와 통화를 끊고 혼자서 그리 정리하였다.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하시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하나님이 주도하실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행 2:23).” 우리가 어찌 해보려고 하는 것은 도리어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다시) 못 박아 죽이는 일’이 될 수 있다. 곧 나의 열심이 또는 어떤 확신이 행여 주의 뜻을 거스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를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을까? 뒤이어 모처럼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서로 안부를 묻고 긴 이야기가 오가는데, 다들 나름은 믿는다는 친구들이라. 친구 중 하나가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그래서 저가 사업차 들어오면 그 핑계로들 모여 늦게까지 술을 마시는가보다. 자기 말마따나 다들 교회를 다니는 친구들이라 누군 집사고 권사고 사업차 오가는 친구는 선교를 운운하는 터라. 이게 다 뭐하는 짓들인지 모르겠어! 하며 친구는 자기 말을 마치 남 이야기하듯 하였다. 어쨌든 아무리 30년 된 대학 동기들이라 해도 유부남 유부녀들인데 늦게까지 술 먹고 주정하고, 엉기고 얽히는 작태들이 듣다보니 가관이었다.

 

세상에 ‘어쩌다 어른’은 없다. 어쩌다 그리스도인은 없다. 어쩌다 교인은 있으려나? 어쩌다 성도는 없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이 모두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인함이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4).” 그리하여 오늘의 우리는 사함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우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술자리에서 연신 선교 활동을 운운하고, 습성에 젖어 시시덕거리면서 어느 ‘성령 집회’ 홍보를 하고, 자신의 블러그에 올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치유사역을 운운할 수 있는 저들의 용기는 어디서 나는 것인지!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러니 참 신앙을 붙들고 사는 것이란 얼마나 귀하고 어려운 은혜인지 다시금 생각하였다.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결코 사람은 선하지 않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11).” 오직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2).” 친구에게 뭐라 하였다. 누구 이야기할 거 없이 너나 정신 좀 차려라, 하고 면박도 주었다. 도로 담배를 피우고 여전히 술자리를 즐기면서, 그러느라 파생되는 이런저런 부적절한 관계들에 대하여 더는 안 들어도 빤하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13-15).” 그래서 더이상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두려운 것이다.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18).” 그러니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것은 두려워할 줄 아는 게 바른 전제이고 이로써 절제하고 조심하는 것이 성도의 꾸준한 수련이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내게 두시는 오늘의 어려움이 복이다. 우리의 불편함이 자세를 바르게 한다. 괜한 고통이란 없다. 주 앞에서는 그것까지도 이끄심이다. 우리는 이제 다 주 앞에서 부르심을 받은 제사장들이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 그리하여 “제사장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위하여 속죄한즉 그는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레 6:7).” 저의 허물을 주께 대신 아뢰며 용서를 구한다.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바란다.

 

이에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나의 남은 날들이 부디 그러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