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7 주일
전도서 8:1-17
하나님의 행사
8:1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8:2 내가 권하노라 왕의 명령을 지키라 이미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였음이니라
8:3 왕 앞에서 물러가기를 급하게 하지 말며 악한 것을 일삼지 말라 왕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다 행함이니라
8:4 왕의 말은 권능이 있나니 누가 그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무엇을 하시나이까 할 수 있으랴
8:5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8:6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
8:7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8:8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8:9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
8:10 그런 후에 내가 본즉 악인들은 장사지낸 바 되어 거룩한 곳을 떠나 그들이 그렇게 행한 성읍 안에서 잊어버린 바 되었으니 이것도 헛되도다
8:11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8:12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8:13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8:14 세상에서 행해지는 헛된 일이 있나니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 의인들의 행위에 따라 상을 받는 악인들도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르노니 이것도 헛되도다
8:15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8:16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8:17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들어가는 말
알든 모르든, 인정하든 부정하든, 믿든 안 믿든,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삶 가운데 관여하시고 역사하신다. 이를 아는 데 있어 누구는 더디고 누구는 즉각적이며, 누구는 한사코 외면하고 누구는 아예 무시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일하신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사 46:10).”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행사’라는 주제로 말씀을 나눌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나의 일생동안 하나님이 어찌 행사하셨는가를 피부로 느끼며 살아왔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일상의 모든 순간과 순간이 주의 손길 가운데 있었다. 물론 내가 외면하고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살 때도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혼자 두신 적이 없다. 죽어 마땅한 죄의 때에도 하나님은 참고 또 기다리시며 나를 인내하셨다. 이를 우리는 동시에 느끼고 나눌 수 있음을 오늘 말씀은 일깨우신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닮아간다.
“누가 지혜자와 같으며 누가 사물의 이치를 아는 자이냐 사람의 지혜는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의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1).”
이는 인상이 좋다, 생김이 좋다는 의미가 아니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여 ‘몸짱’이니 ‘얼짱’이니 하는 소리로 연상해서는 안 된다. 인위적인 표정관리나 노력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흔히 아이의 얼굴을 보며 ‘천사 같다.’는 표현을 쓴다. 한 번도 천사를 본 적이 없으면서 왜 우리는 천사 같다는 표현을 쓸까? 우리 안에는 은연중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알아보는 유전인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 6:15).” 우리에게 두시는 첫 번째 증거는 얼굴이다. 얼굴은 자신만 못 본다. 모르는 사이 가장 먼저 드러나서 감출 수 없는 마음이 얼굴에 서려진다. 이는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그래서 보면 믿는 사람들의 표정은 한결같은 어떤, 온화함이 스며있다.
오늘 말씀은 우리의 지혜가 우리로 하여금 얼굴의 사나운 것을 변하게 한다고 한다. 우리도 알다시피 얼굴이 고약한 사람은 대체로 성격도 고약하다.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이 있고, 간사함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이 있으며, 슬픔과 기쁨을 얼굴에 그대로 묻히고 살 수밖에 없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 2:15-16).”
그러므로 남의 얼굴에 침뱉지 말자. 이는 저에게 두신 권세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 저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관용하고 온유함으로 저의 얼굴을 대해야 한다.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1-2).”
이는 역설적으로 누가 우리를 대하는 데 있어서도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7).” 우리는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남들로부터 함부로 굴지 못하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려면 그 권위는 자신이 지켜야 하는 것이다. 나다나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 나오는 어니스트처럼 어느새 우리는 주를 닮은 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하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얕보지 못한다. 이는 세상이 주장하는 실력이 아니다. 학벌이나 재산이나 지위나 명성이 주는 게 아니다. 실은 얼마나 많은 권세자들이 조롱거리가 되어 살아가는가.
우리는 다만,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것으로 삶이 증명되는 것은 분명히 저들과 다른 가치와 목적과 생활 태도가 있다. 곧 우리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4).” 이는 오늘 본문 5절 말씀으로 그 뜻을 음미할 수 있다.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곧 우리는 어떤 일이 터졌을 때 확연히 다르다. 평소에는 잘 모른다. 어쩌면 안 믿는 자나 믿는 자가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전혀 다른 것이다.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쪽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쪽에 있느니라(10:2).” 곧 우리는 깨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그래서 우린 도리어 ‘잔칫집’보다 ‘초상집’에 더 마음을 두고 산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마치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한사코 외면하고 태연한 척 군다. 그러나 우리는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우리는 이미 부끄러운 게 무엇인지 안다. 정작 두려운 일은 죽고 난 뒤 누구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사는 게 이 땅에서의 삶으로 전부라면 뭐 굳이! 그러나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눅 21:34).”
우리는 허망한 것을 좇지 않는다. 돈의 노예로 살지 않는다. 건강의 노예가 되지도 않는다. 가족이나 자녀의 노예로 살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엡 4:17).” 이 모든 게 다 끝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전 8:9).” 우리의 가장 큰 허망함은 우리가 스스로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로부터이다.
둘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 무슨 일에든지 때와 판단이 있으므로 사람에게 임하는 화가 심함이니라(5-6).”
말씀을 준행하려 하는 자의 특징은 저가 불행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 인생을 살면서 불행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뜻하지 않은 실패와 배신과 느닷없는 환난과 역경이 우리를 얼마나 자주 불행하게 만드는가? 그런데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한다니! 하루는 백부장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자신이 아끼는 하인이 죽게 생겼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가자고 하셨다 그런데 그가 말한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마 8:8-9).”
예수님이 이의 말을 듣고 놀라워하셨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10).” 무슨 의미일까? 우리의 불행까지도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이가 누구인지, 믿음의 사람들은 아는 것이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이와 같은 마음의 지혜가 있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3).” 그래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13-14).” 곧 말씀을 붙든 자, 명령을 받은 자는 불행조차도 주의 것임을 아는 까닭이다.
셋째, 우리는 심판을 홀로 받는 사람들이 아니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7-8).”
죽음 너머에는 심판이 있다.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모두 그렇다. 한데 저들은 홀로 심판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대언자가 계신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저는 우리의 증인이시다. 중보자이시다. 대속자가 되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이 심판대는 아무도 그냥 통과할 수 없다. 그래서 나름 애쓰고 수고한 사람들이 항의하였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 7:22).” 저들은 한다고 했다. 한다고 했음으로 자신들이 한다고 한 것을 믿었다. 그런데 심판대 앞에서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 무슨 일일까? 우리의 수고와 애씀이 우리의 수고와 애씀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곧 우리의 지나침은 저들의 무관심보다 죄가 크다. 안 믿는 저들은 굳이 하나님을 거론하지 않는다. 한데 우리의 수고는 주를 우롱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주일을 지키고 성경을 읽고 헌금을 하고 봉사와 희생을 하는 것이 그것을 빙자하여 자신이 바라는 꿍꿍이가 있다면! 즉 하나님을 이용하려 드는 열심과 헌신이 얼마나 교묘하게 우리를 속이고 있는지! 그래서 전도자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우리의 지나침이 우리를 무례하게 하는 것이다.
이를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보고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살핀즉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 때가 있도다(8:9).” 즉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우리는 다만 주를 경외하는 사람들이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7:18).” 그러므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92:14).”
나오는 말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하나님이 사람을 해 아래에서 살게 하신 날 동안 수고하는 일 중에 그러한 일이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15).”
지난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웃음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희락이라 보았다. 우리의 지혜는 주를 경외함이고,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을 앎으로 영생이며, 우리의 희락은 하나님의 웃음을 따라 박장대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니 우리는 이로써 주의 행사를 안다(2:26). 고로 우리는 불행 가운데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는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벧전 1:6).”
어떻게 그럴 수 있나? 말씀이 약속하고 계신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곧 우리는,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 17:8).” 우리도 알 수 없는 우리의 놀라운 가치를 잃어서는 안 된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세상을 보면 금세 물든다.
그럴 수밖에 없는 나약함이 우리의 본성이다. 그런 우리의 연약함을 주님도 아신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벧후 2:9).” 이를 오늘 말씀으로 이해해보자.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12-13).” 우리는 엄연한 죄인이지만 더는 악인이 아니다!
고로 “다만 그들이 항상 이같은 마음을 품어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그들과 그 자손이 영원히 복 받기를 원하노라(신 5:29).” 결국은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잠 22:4).” 그러므로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행사’를 간증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정리한다. “내가 마음을 다하여 지혜를 알고자 하며 세상에서 행해지는 일을 보았는데 밤낮으로 자지 못하는 자도 있도다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전 8:16-17).”
우리가 아무리 안다 해도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행사에 대하여, 비록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러므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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