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210 주일
전도서 2:26
지혜와 지식과 희락
2:26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들어가는 말
명절을 지내고나면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것이 세월의 흐름이다. 언제 저 아이가 저렇게 자랐나? 싶은 놀라움에서부터 부모나 일기친척 어른들이 눈에 띄게 늙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세월의 흐름이란 언제나 자신만 모르는 덫과 같고 그 앞에 놓인 죽음이란 설마, 하고 남의 이야기하듯 하는 현기증과 같다. 마음은 여전한데 몸이 먼저 아는 세월의 무게 앞에서 우리의 미련함은 여지없이 드러난다. 어느 순간 쇠약해져 있는 육신이나 행여 누가 먼저 세상을 떠난 이야기 앞에서는 더욱.
그럼에도 한사코 외면하며 안 듣고 모르는 척 구는 우리의 미련함이라니! 오늘 말씀은 이를 일깨우신다. 코앞에 놓이기 전에 아직 기회가 있고 기운이 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돌아보게 하신다.
인생으로는 결코 인생의 벽을 넘을 수 없다.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1).”
천하의 솔로몬이다. 안 해본 게 없고 못할 게 없던 그였다. 그는 인생에서 시험 삼아 모든 인생의 낙을 누리려 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헛되다. 성경은 일관되게 한 목소리를 낸다.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시 39:11).” 결코 우리 인생으로는 우리 인생의 벽을 넘어설 수 없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62:9).”
인생은 결국 일시적일 뿐이다.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2).”
오늘 날 온갖 즐거움을 좇아 사는 우리들에게 이보다 더 두려운 말씀이 있을까? 아직 젊으니까, 젊을 때 해보지 언제 해봐! 하는 따위의. 기껏 살아서 살아봐야 안다는 소리로는 너무 위태롭기만 한 것이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하는 게 인생이다. 조금만 뒤를 돌아봐도 안다. 언제 십대가 지났고 이십대가 흘러간다. 장년이 되었는가 싶은데 노년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얼마나 희락을 찾아서 수고하였던가!
그러니 그냥 이렇게 죽고 나면 그만이라 한다면 얼마나 허무한가? 불교적으로는 오늘의 우리는 해체뿐이고 철학적으로는 우주의 흔적도 없는 지점에 이를 뿐인데, 성경은 이른다. 속지 말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고전 15:32-33).” 더 나은 게 무언가?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5).”
인생의 쾌락은 허망하다.
“내가 내 마음으로 깊이 생각하기를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을 지혜로 다스리면서 술로 내 육신을 즐겁게 할까 또 내가 어떻게 하여야 천하의 인생들이 그들의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것이 선한 일인지를 알아볼 때까지 내 어리석음을 꼭 붙잡아 둘까 하여(3).”
스스로 자신을 위해 사는 ‘욜로족의 시대’에 마치 우리는 천년만년 누릴 것처럼 군다. 그러나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사 22:13).” 그런들 그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벧후 2:13).” 그 즐기고 노는 것이 속임수이다.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우리의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짓고 포도원을 일구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나를 위하여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을 주기 위하여 못들을 팠으며 남녀 노비들을 사기도 하였고 나를 위하여 집에서 종들을 낳기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도 내가 소와 양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졌으며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4-9).”
꿈을 가졌다(4). 낭만을 꿈꾸었다. 누구보다 열심을 다했다(5). 스스로 자아실현을 가치 있는 일로 여겨 자기를 위하여 살았다(6). 당연이 부와 권세와 명예를 얻었다(7-9). 그러들! 예수님은 설교하셨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9-21).”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그러므로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후 5:1).” 즉 빈부격차를 막론하고 모두의 장막은 무너진다. 우리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 아닌 것이다.
첫째, 우리는 오늘까지 주의 긍휼하심으로 살았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사 49:10).”
둘째, 예전의 우리는 죽었고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셋째, 우리에게서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그렇다면 우린 이제 어찌 행해야 할까?
첫째, 탐욕에 빠지지 않기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둘째, 자족하기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셋째, 성령이 충만한 삶으로 살기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이 모든 것이 성령 충만한 자의 삶의 증거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지만 그러므로 더욱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육신으로 끝날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로 우리는 동행을 바로 삼아야 한다.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 1:19).”
끝나기까지 끝난 게 아니다. 승리의 개가는 맨 마지막에 부르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10-11).”
돌아보면 항상 후회와 회환뿐인 것 같으나 그러는 동안에도 우리 영혼은 성장하였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오늘 이와 같은 말씀에 귀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땅에 심은 공적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전 3:12-13).”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이 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결코 우리의 자력으로 인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
“내가 돌이켜 지혜와 망령됨과 어리석음을 보았나니 왕 뒤에 오는 자는 무슨 일을 행할까 이미 행한 지 오래 전의 일일 뿐이리라(12).”
자기 의지가 가장 강할 때가 청년의 때이다. 물불 안 가리고 무서울 게 없을 나이다. 뭐든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 모든 청년이 다 그러는 것은 아니다. 일찍 주의 사명에 눈을 뜨고 말씀을 붙들고 사는 것이 복되다. 모두가 알다시피 인생이란 의지할 게 못 된다.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젊음이나 건강이 가장 위태로운 까닭은 언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지혜가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안다. 또한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과 긍휼하심을 안다. 우리의 앎이 곧 영생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세상의 자랑은 허탄할 뿐이다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13).”
이 세상에서는 지혜자나 우매자나 그 끝이 똑같은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따름인데,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렘 9:23).” 왜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자랑하지 않는가?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19-21).”
죽음을 인식하고 사는 삶이 지혜다.
“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 속에 있고 우매자는 어둠 속에 다니지만 그들 모두가 당하는 일이 모두 같으리라는 것을 나도 깨달아 알았도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매자가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게 지혜가 있었다 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였도다 이에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하였도다 지혜자도 우매자와 함께 영원하도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모두 다 잊어버린 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 내가 해 아래에서 내가 한 모든 수고를 미워하였노니 이는 내 뒤를 이을 이에게 남겨 주게 됨이라(14-18).”
그래서 성경은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해달라고 구하였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짧디 짧은 인생을 두고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90:12).” 곧 지혜의 기저에는 나의 허무한 짧음을 바로 아는 것이다. 곧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49:17).” 평생 좇던 것을 모두 두고 갈 따름이다. 이에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믿음의 상속자가 되자
“그 사람이 지혜자일지, 우매자일지야 누가 알랴마는 내가 해 아래에서 내 지혜를 다하여 수고한 모든 결과를 그가 다 관리하리니 이것도 헛되도다(19).”
그렇다면 우리는 믿음의 상속자로 살자. 우리가 선택한 인생이 아니듯이 우리가 선택한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였고, 오늘 우리에게 맡기신 날을 사는 것이다. 그런 우리는 과연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우리가 물려받을 유산은 무엇인가?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7).” 안 믿는 부모를 위해 또한 형제를 위해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바로 알아야 한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나오는 말
첫째, 청지기로 살자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에서 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내가 내 마음에 실망하였도다(20).”
청지기는 맡은 자이다.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다. 그러므로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 우리도 거저 받은 인생이다. 그러므로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둘째, 삶을 허비하지 말자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다하여 수고하였어도 그가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그의 몫으로 넘겨 주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큰 악이로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1-23).”
인생은 그저 허망할 따름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6-7).” 우리의 소망은 단지 주께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 55:2).” 참된 양식이 필요하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요 6:27).”
셋째,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으로 살자.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24-26).” 곧 주신 바에 충실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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