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317 주일
전도서 11:1-10, 12:1-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11:1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11:2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
11:3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
11:4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
11:5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11:6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11:7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
11:8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
11:9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
11:10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12: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들어가는 말
근심이 늘 우리를 엄습한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기적을 좇는 사람들’로 만든다. 우리의 믿음을 단지 사는 데 따른 기적을 구하는 정도로만 여긴다. 그래서 근심을 더는 일이 다라면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늘 말씀에 앞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에 먼저 귀 기울여보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개인적으로 자주 묵상하고 암송하는 말씀이다.
누구보다 예수님도 근심하셨다.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으로 우리처럼 오신 예수님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절규를 외치셨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12:27).” 결국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시다. 우리 안에 이는 여러 감정은 그 자체로 나쁜 게 아니다. 가령 분노가 무조건 나쁜가? 누구보다 하나님도 분노하셨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시 7:11).” 저는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의롭지 않은 불의에 대해 무감각하실 수 없었고, 재판장으로서 시시비비를 놓고 매일 분노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곧 우리의 감정은 모두 주를 바라는 데 유용하다. 분노가 있음으로 우리 안에 옳은 것을 갈구하는 새로운 의지와 새 힘을 얻는다. 우리의 비통함으로 치유가 시작되고 오히려 이를 느끼지 못한다면 마비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우리의 슬픔은 지나간 일을 정리하고 정화하는 기회가 된다. 우리 안의 두려움은 위험을 미연에 감지하고 분별력을 더하며 지혜를 얻게 한다. 우리의 죄책감은 양심을 일깨우고 어긋난 태도를 돌이키게 한다. 우리의 수치심은 또한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하여 우리 자신이 얼마나 제한된 존재인가를 겸허히 수용하게 한다.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은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즉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근심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근심하지 않을 수 있는 엄연한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하셨다. 첫째,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것. 둘째,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것. 셋째,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접하신다는 것. 곧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2-3).”
여기서 ‘아버지 집’은 죽어서 우리가 들어갈 하나님의 나라 천국, 하나님의 집이면서 동시에 지금 여기, 우리가 살아서 살고 있는 바로, ‘이 곳이여!’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창 28:17).” 바로 오늘, 여기, 우리에게 두시는 시간과 공간이 ‘아버지의 집’이다. 그곳에 ‘거할 곳이 많다.’는 것은 우리가 온유함으로 얻을 땅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온유하다는 것은 마치 엄마 품에 안긴 젖 뗀 아이의 안정감을 연상하게 한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그런데 그럼 이를 ‘예비하러’ 가신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곧 자신의 죽으심을 말씀하시면서 그 목적을 일깨우는 것이다. 저의 죽으심은 부활로 이어지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우리의 처소가 되는 것이다. 보혜사 성령을 오늘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으로 이해해도 된다. ‘다시 오신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으로 오늘,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우리 곁에, 날마다 새롭게 다시 오신다는 의미다.
즉 앞서 우리의 감정과 그 근심으로 인한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본 것은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불투명한가를 오늘 본문을 인식시켜주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저마다 망각의 늪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얼마나 불안한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보험을 더하고,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값싼 위로를 찾고, 자신의 수치심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거짓된 삶을 꾸며가며 살고 있는지!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누구도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이에 믿는 사람으로서 과연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설마 우리는 기적을 바라는가? 기적을 바라고 왔던 수많은 사람들은 이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사람으로 살면서 사느라 주께 아뢰고 구하는 ‘기적’이나 ‘행운’을 어찌 뭐라 할 수 있겠나만 우리의 믿음은 그 정도 값싼 수준의 구원으로 그치는 게 아님을 오늘 본문은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무모함은 여러 날 후에 찾는다.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1)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점점 단순해지는 일이다. 전에처럼 복잡할 게 없다. 부산하고 늘 바쁘게 몰아치는 삶은 대체로 방종에 이르고 자기수고에 겨울 따름이다. 우리의 단순함은 기쁠 땐 찬송하고 슬플 땐 기도한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시 135:3).” 여기서 한 가지, 사탄이 절대 할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것은 찬송이다. 저는 다 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약 2:19).”
우리처럼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할 줄도 안다. 선도 추구하고 의로움도 구사한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2).” 사탄이 더 천사 같은 세상이다. 곧 우리의 삶이 초라해진다. 무모하기까지 하다. 이런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할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묵묵히 무던할 수 있는 것은 주를 바라고 가는 길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을 간다.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2).”
일곱은 성경에서 완전수이다. 우리의 수고는 할 수 있는 만큼에서 하나를 더 하는 것이다. 그 정도면 된다. 우리 곁에 주님이 계신다. 그러므로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42).” 곧 해야 할 일을 하되 할 수 있는 만큼에서 하나를 더 하자.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눅 6:35).” 어찌 그럴 수 있겠나?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다고? 우리 안에 드는 회의와 낙심과 실망도 모두 말씀 붙들고, ‘내 떡을 물 위에 던지는 일이다.’ 곧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8-9).” 나는 할 수 없으나 나로 하여금 할 수 있게 하시는 이의 능력 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우리가 하는 게 아니라 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한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3).”
원래 ‘생각이 많으면 구름 위를 걷고 우리 발은 땅을 딛을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생각만 많고 나중에, 좀 형편이 나아지면, 하고 미루는 동안은 그저 구름 위를 걷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어김없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벧전 1:17).” 스스로 믿음이 있으니까, 하고 방심하지 말자. 믿음의 증표는 행함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아버지로 부른다는 의미는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벧후 3:7).”
세상이 어떠니 저떠니 부화뇌동할 거 없다. 저들이 지금은 이기는 것 같고 저들이 더 현명한 것 같고, 그래서 부럽고, 괜히 주눅이 들어 우리는 그저 무모한 것 같다 해도, 아브라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떠났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준비하고 대처해야 할지, 저에겐 그런 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앞으로 무슨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지금, 하나님이, 여기,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신앙은 일상을 사는 것이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라(4).”
좀 더 이어보면,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 11:8).” 다시 말하지만 저는 처음부터 믿음이 대단해서 그리 순종한 게 아니다. 말씀이 있으니까, 믿어지지는 않지만 그것이 무모하다 해도, 말씀 붙들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그런데 우린 자주 풍세만 살피고 구름만 올려다본다. 혹시나 하고, 설마 하면서!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지는 않는다. 미루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막연한 종교의 무모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읽는다는 것은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의 부족함이 주의 도구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5).”
마치 잘 아는 것처럼 굴지만 자기보다 자신을 가장 모르는 존재도 없다. 일찍이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7-9).” 저가 구한 기도는 주의 백성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주께 올려드리는 기도였다.
우리의 수고는 주께 있다.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이것이 잘 될는지, 저것이 잘 될는지, 혹 둘이 다 잘 될는지 알지 못함이니라(6).”
우리의 어떤 지나침이 늘 우리를 그릇되게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지혜자는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지나치게’란 자기 기준과 판단으로 세운 수고와 애씀이다. 오히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마치 우린 다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를 경외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자기보다 교활한 자신의 적은 없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수고를 전적으로 하나님께 돌렸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살전 2:9).” 곧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어둠을 직시하자.
“빛은 실로 아름다운 것이라 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즐거운 일이로다(7).”
빛이 있으면 어둠은 걷힌다. 상대적으로 어둠은 빛을 싫어한다. 세상이 복음을 싫어하는 것은 당연하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 저들이 몰라서 그럴까? 아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우리가 이처럼 빛 앞에 나온다는 것은 실로 아름답고 귀한 일이다. 이 값어치를 알 때 절대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다. 때론 우리에게 더하시는 어려움이나 실패 때문에, 또는 불확실성 때문에 주춤거릴 때도 있지만,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 30:5).” 세상은 결코 그럴 수 없다.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7).”
기쁨과 단순함을 위하여
“사람이 여러 해를 살면 항상 즐거워할지로다 그러나 캄캄한 날들이 많으리니 그 날들을 생각할지로다 다가올 일은 다 헛되도다(8).”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단회적이다. 일순간일 뿐이다. 그래서 유행은 돈다. 사람들은 유행을 따라 간다. 존재론적인 허기를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만 있으면, 하고 죽어라 그것을 가졌는데 갖고 보니 별 거 아닌 게 유행이다. 때론 우리가 선을 행하는 일에 있어서도 뭔가 보상이 따르고 주의 축복이 현실적으로 부여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서, 이 길이 맞나? 싶어 낙심할 때도 있지만,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 6:9).” 곧 우리는 그 너머를 보는 사람들이다.
어려서부터 잘 가꾸어야 하는 게 희락이다.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들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들과 네 눈이 보는 대로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너를 심판하실 줄 알라(9).”
할 수 있을 때 다 해, 더 늙으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 하는 소리를 우리는 조언이랍시고 종종 한다. 이는 틀렸다. 우리의 즐거움은 ‘하나님의 웃음’이다. 나이 들어 더는 희망이 없던 사라에게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다. 저를 이삭이라 하였다. 하나님이 우리로 웃게 하신다고 말이다. 희락이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과 같이 웃는 즐거움이다. 이는 깨끗한 마음에서 온다. 저가 만일 그처럼 애써 수고할 때 아들을 얻었다면 이 기쁨을 알기나 했을까? 결국 몸종 하갈을 통해 아들을 얻고 그 수모까지 겪고 난 뒤였으니, 희락은 그 맛이 다르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 2:22).” 마치 뭐든 다 해도 해가 될 게 없을 것 같은 청년의 때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희락을 열심히 훈련해야 한다. 우리가 들어갈 천국은 희락하는 곳인데,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훈련된 희락으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를 잡고 휘두르는 감정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자
“그런즉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 때와 검은 머리의 시절이 다 헛되니라(10).”
너무 애쓸 거 없다. 누군 기질적으로 우울하고 누군 유쾌하다. 누군 키가 크고 누군 키가 작다. 누군 건강하고 누군 병약하다. 여기서 누구처럼, 하고 저울질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게 된다. 마치 천년을 살 것처럼 애쓰고 수고하지만 감정이란 늙으나 젊으나 멋대로 오락가락하게 돼 있다. 이에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그런 마음은 어떤 것일까? 기쁜 일? 너무 좋아하지 마라. 슬픈 일? 너무 괴로워하지 마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나오는 말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12:1-2).”
더는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없는 날이 오나니, 사람은 모두 한 길로 간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 4:6).” 많은 사람이 생명 연장을 위해 애쓴다. 누구는 대놓고 존엄한 죽음을 연구한다. 이는 모두 헛되다. 헛되고 헛되 바람을 잡는 일 같다. 다만 우리는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산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때가 가장 행복하다.
너무 좋아하지 말고, 너무 슬퍼하지 마라. 너무 애쓰지 말고 너무 수고하지도 마라. 다만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에서 하나만 더 해도 된다. 해야 할 일에 해야 할 일을 하나 더하면 된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그냥, 눈물을 흘리면서도 할 뿐이다. 해야 할 일이면 말이다. 낙심하고 말고도 없다. 다만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음이 귀하고 복된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에게나 여덟에게 나눠 줄지어다 무슨 재앙이 땅에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함이니라(전 11:2).” 알 수 없고 알지 못하는 것에 있어서 죽어라 하고 삶을 허비하지 말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1-12).” 아멘.
'[설교원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도행전 3:1-26 /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0) | 2019.03.29 |
---|---|
전도서 12:9-14 / ‘잘 박힌 못’과 같이 (0) | 2019.03.22 |
전도서 10:8-11, 행 2:37, 42 / 무딘 연장을 벼리자 (0) | 2019.03.01 |
전도서 8:1-17 / 하나님의 행사 (0) | 2019.02.14 |
전도서 2:26 / 지혜와 지식과 희락 (0) | 2019.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