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전도서 1:12-18 / 세 개의 유일한 권세

전봉석 2019. 1. 31. 11:24

20190203 주일

 

 

 

전도서 1:12-18, 히브리서 9:4

세 개의 유일한 권세

 

 

 

전도서

1: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1:1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1:14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1:15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1:16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

1:17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

1: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히브리서

9: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들어가는 말

 

옳은 것과 그른 것이 함께 할 수 없다. 어둠과 빛이 공존할 수 없고 선과 악은 섞일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동시에 가능하지 않다. 성경은 이를 엄연히 가른다. “내가 두 마음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119:113).” 이는 우리의 처신과 그 삶의 자세를 이르는 말씀이다. “그들이 두 마음을 품었으니 이제 벌을 받을 것이라 하나님이 그 제단을 쳐서 깨뜨리시며 그 주상을 허시리라(10:2).”

 

이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과 같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이에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1:8).”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4:8).” 성경이 일컫는 말씀은 흑백논리의 것이 아니다. ‘선 아니면 악’, ‘하나님 아니면 사탄이라는 식의 논리가 결코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여호수아는 절규하였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24:15).” 다들 어떠하든, 우리는 어떠한가? 그리스도인들이라 한다면 과연 무엇이 저들과 다른가? 달라야 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이쪽이냐 저쪽이냐를 묻는 것이 결코 아니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30:21).” 곧 이쪽이냐 저쪽이냐 하는 식으로의 편 가르기가 아니다. 다만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오직 우리에게는 한 길,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그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들 가운데 모퉁잇돌이 되셨으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2:10).” 바로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이는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3:16).”

 

즉 우리는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 이성애자냐 동성애자냐, 야당이냐 여당이냐, 이 사람을 지지하느냐 저 사람을 지지하느냐, 많이 배웠냐 적게 배웠냐, 또한 선을 행하였느냐 악을 행하였느냐 하는 문제 앞에서 어느 쪽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어느 쪽이든 모두는 죄인이다. 어느 쪽으로도 선을 이룰 수 없다.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 인간의 그 무엇도 하나님을 찾아 잃어버린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로 나아갈 수 없다. 오직 한 길,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우리를 옳게 하실 따름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만이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한다. 우리가 믿는 믿음에는 차선이 없다. 오직 최선만이 있을 뿐이다.

 

유일한 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1:12-13).”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그 때와 시기를 알지 못한다. 알 수 없으니 각자 처한 상황에서 좋을 대로 판단하는 것이겠으나,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1:7).” 우리는 다만 그 감추인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아는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7:14).”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2:3-5).” 이는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고 오늘 말씀은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17:11).” 맡기신 날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주를 경외함으로 말이다.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다

내가 내 마음 속으로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내가 크게 되고 지혜를 더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 하였나니 내 마음이 지혜와 지식을 많이 만나 보았음이로다(1:16).”

 

성경은 누누이 이른다. 세상은 허무할 따름이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4).” 단지 이는 염세적인 의미의 표현이 아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다. 어떤 권세도 오래가지 못하고, 아름다운 꽃도 후에는 질 따름이다. 이 모두는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그러므로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15).” 그것이 우리의 실체다. 우리의 수고와 애씀으로는 이를 수 없다.

 

하면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 바울 사도는 왜 이렇게까지 겸허하게 말씀을 전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곧 우리 스스로 이를 지혜는 없다. 우리의 어떤 선행도 의로움도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도 만족할 것이 못 된다. 우리에게는 그 무엇도 자랑할 것이 없다.

 

오직 말씀만으로 서게 하신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1:17).”

 

우리는 모두 이미 수고하고 애쓴 것으로 족하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하여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원하여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엄연히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릴 창세전부터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것이다. 이를 바로 안다면,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2:3).” 다른 모든 걸 잃는다 해도 이 진리와 바꾸지 않는다.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우리는 굳건하게 선다.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곧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서 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남들과 다른 <세 개의 유일한 권세>를 주셨다. 이 성경의 권위가 곧 교회의 권위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권위가 곧 말씀이다. 세상이 알 수 없고 줄 수도 없는 권세이다. 오늘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정금 같이 굳건하여져서 그 믿음으로 둘러 싼 언약궤 안에 두신 세 가지의 권세를 상기시킨다.



우리에게 두신, 세 개의 유일한 권세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9:4).”  

 

성경은 이를 명확히 하신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11:45).” 이를 베드로의 목소리로 들어보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기뻐한다는 것이다. 앞서간 믿음의 선친들이 모두 그러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이 거룩을 사모한다.

 

그 목적은 무엇인가?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첫째, 만나 항아리

이는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그러는 동안 우리의 첫 번째 권세는 만나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신다. 때를 따라 먹이시고 입히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6:25).”

 

한데 우리의 근심은 끊이지 않아서,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3).” 세상 염려와 세리의 유혹으로 넘어지기 일쑤다. 엄연히 우리는 영적인 사람들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4:34).” 곧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가졌다. 만나 항아리, 곧 주어진 현실이 어떠하든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코 모자람도 남음도 없는 적당함으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채우신다.

 

둘째,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당시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반기를 들었다. 어찌 모세와 아론만이 하나님을 안단 말인가? 나름 자기들의 방식으로 자신들도 믿고 섬긴다고 하였다(민수기 16). 그러니 어찌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단 말인가? 하고 저들은 오늘에도 여전히 교회가 어떻고, 목사가 어떻고 하면서 새로운 방도를 모색한다. 더 나은 진리를 추구한다. 합의점을 찾고 타당하고 설득력 있는 길을 모색한다. 이때 우리에겐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있다. 곧 오직 하나, 하나님의 방식으로만 나아갈 수 있는 길.

 

성경은 엄연히 그 본을 보이셨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8:5).” 그리고 어떠하든 그리로 가라 하신다.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30:21).” 우리에게 묻기를 너희가 어느 쪽이냐? 어떤 처지에 놓였느냐? 하고 묻는 게 아니다. 다만 유일한 길,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우리는 토론과 논쟁을 벌여 취합하고 얻어낸 것을 진리로 따르는 게 아니다. 우리 곁에 있는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승승장구하는 것 같다.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 우리에게는 다만 예수만이 본이시다. 우리를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 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다른 방책은 없다.

 

셋째, 언약의 돌판들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 다시 말하지만 오늘 우리의 권위는 성경이다. 교회의 권위는 말씀을 선포하는 것뿐이다. 서로의 의견이 분분하고 그래서 타협점을 찾는 회중의 모임이 아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3:3).” 때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쪽이 승리하는 것 같다. 그러나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1:13).”

 

그러므로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2:14).”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괜히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게 아니다. 결코 어쩌다 구원을 이루시기로 한 게 아니다. 이를 바울은 피 끓는 심정으로 고백하였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1:21).” 고로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23).” 그러한 우리의 나약함을 말씀만이 붙드신다.

 

 

나오는 말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1:18).”

 

나름의 판단과 기준으로 선택하라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 우리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에 따라 지으심을 받았고, 또한 부르심을 얻었다. 어쩌다 일이 이리 된 게 아니다. 그러니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0:42).” 이제 우린 반드시 붙든다.

 

언약의 돌판들’, 말씀을 붙듦으로 믿음으로 나아간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로 그 본을 흩뜨리지 않고 온전히 세워진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5:1).” 우리는 결코 그 어떤 지혜와 지식으로 이를 감당할 수 없다. 오직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58:11).”

 

오늘도 우리에게는 만나 항아리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우리의 그 어떤 수고와 노력에 의한 게 아니라, 이 길을 먼저 걸어간 허다한 믿음의 선친들을 따라 그 터 위에서, 본을 보이신 예수를 따라간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5).”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