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 명령하신 날에 시내 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령하셨더라
레위기 7:38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
시편 132:13-14
문득 드는 생각이 내가 내 삶을 택한 게 아니다. 나를 택하신 이가 나의 삶을 조성하셨다. 그것도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5).” 그 목적과 이유가 분명한 것이다.
때론 마땅치 않아 그것으로 이미 힘에 부친다 해도, 우리는 모든 문제의 기본 전제가 하나님의 성품에서이다. 어떤 문제를 푸는데 있어 하나님의 성품을 바로 앎으로 문제를 단지 문제로만 여길 게 아니라는 데 다다른다. 믿음이란 그렇듯 조건반사적인 게 아니라 오히려 무모할 정도로 확고한 것이다. 이는 많은 선친들이 그리 걸어간 길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믿음으로 가는데 약속을 받지 못하는 삶이어도 환영하며,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살다 갈 뿐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본향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연연해하지 않는 것. 주신 바 두신 자리에서 묵묵히 준행하였던 에녹이나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모두의 공통점은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도 그게 꼭 말이 되어야 한다고 이치를 따지고 상식을 운운하며 자기 생각을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들었고 이에 따랐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은, 그럴 수 있는 게 믿음의 신비였던 것이다.
아이 블러그에서 믿음의 추상성에 대해 종종 회의가 든다는 내용을 읽고 한참 머물러 뭐라 말해줘야 하나 댓글을 달까하다가 그냥 두었다. 우선은 오늘 오후부터 성경공부를 다시 하기로 했는데 에베소서를 가지고 할 생각이다. 나아가 아이의 마음에 그와 같은 고민과 때론 회의도 하나님을 더욱 아는 데 깊이가 더해질 것이라 믿었다. 제대 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나에게도 보이는 걸 아이도 듣고 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들 졸업식 날, 속속 보내오는 사진으로 보면서 울컥,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지만 끌려가지는 않았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울지 않았다. 감정보다 속임이 많은 것도 없었다. 하필 공장에서 퇴근하고 성경공부를 와야 하는 녀석이 얼굴에 뭐가 자꾸 나서 병원엘 가야 한다고 집으로 갔다. 오후 늦게라도 다시 올까 하는 걸 쉬고 주일 날 보자고 달랬다. 하나님은 종종 의도적으로 나를 혼자 두신다. 서러운 마음 대신 로이드 존스 목사의 <진정한 기독교>를 읽었다.
토요일인데도 각각 사무실에 사람들이 다 나와 일을 하였다. 찬양을 틀어놓고 듣는 볕에 나른한 글방 안은 황홀할 정도로 고요하였다. 아이가 못 오겠다는 소식에 맥이 풀려 급 배가 고팠다. 1시 반을 넘겨 2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가 연어초밥을 가져와서 먹었다. 그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내가 여길 원한 게 아니다. 이 인생을 취한 게 아니며 교회를 선택한 건 더더욱 아니다. 교회가 나를 취하였고 나의 인생이 나에게 주어진 것이며 오늘 여기, 나의 역할이 나를 붙드는 것이다.
내가 어찌하려고 하는 마음은 궤도 수정을 한 것처럼 받아들임으로 그 가운데서 충실하기로 하였다. 보잘것없으나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다. 그리하게 하시는 이의 의중을 살피고 뜻을 따라 바라는 일이다. 여기에 도움을 더하시는 말씀을 소리내어 읽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나는 더 이상 이 말씀에 토를 달지 않는다. 이미 죽어 마땅한 죄인이었음을 기억한다.
안이한 마음이 들 때 돌아보아 내가 주를 멀리하며 살던 때를 생각한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하다못해 사람들이 알면 더 이상 나를 상종도 않을 것이다. 나에겐 오직 혐오뿐이라. 이처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3).” 이를 누구보다 나는 인정하고 고백한다.
그런 나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4-5).” 이와 같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받아들임으로 자신의 은혜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 아이와 무엇으로 성경공부를 할까하다가 에베소서를 함께 읽기로 한 것은 그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어떻게 위암말기로 죽어가는 이와 함께 이 본문을 읽었던 것일까?
‘그녀와 보낸 50일’은 나에게 늘 벅찬 감격의 선물이었다. 느닷없이 병문안을 갔고, 아저씨! 난 죄가 많은데 정말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앙상한 몰골의 절실함 앞에서, 내 속에 알 수 없는 갈급함이 느껴졌던 것은 말 그대로 불가항력적이었다. 불안장애로 간신히 약을 먹고 한 번 그리 다녀오는 것으로 인사치레를 하려던 것인데, 내일 다시 올게! 우리 성경공부하자! 하자 죽어가는 그녀 앞에서 내 안에 역사하시는 어떤 이의 임의로 인도하심을 보았다.
그렇다고 내가 어디 본문을 정하고 있던 것도 아니고, 나야말로 목사고시를 두 번씩이나 떨어져서 더는 가망이 없나 낙심을 하고 있을 때였으니! 하나님의 손길은 언제나 극적이었다. 그렇게 한두 구절씩 함께 에베소서를 읽고, 우리를 이 땅에 두신 이가 우리로 이 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도대체 무슨 일을 치르셨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이는 어쩌다 그리 된 게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정하신 바 된 일들로, 오늘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자리가 기묘한 긍휼하심이라는 거.
그런데 그 말씀이 지금도 종종 내가 뒤틀려 마음이 저 혼자 들썽거릴 때 문득 다가오는 말씀이 되었으니,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5:1-2).”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남은 생은 무엇으로 사는지, 말씀이 나를 붙들어다 말씀 앞에 앉히시는 것이다.
마치 의연하고 아무렇지도 않은듯 그처럼 초연하게 뭔가 근사한 폼을 잡는 게 아니다. 나는 아들의 졸업식장 사진을 보며 그곳에 함께 가지 못한 신세를 한탄하였고 우울하였고 속상하였고 그냥 누구라도 붙들고 엉엉 울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그리 살 수 있게 하시려고, 이처럼 이끄시는 삶이어서. 모든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서부터 출발한다. 주는 선하시다. 선하신 이가 내게 두려움과 고통의 시간을 더하신다면 그것이 신호다. 기호다. 주의 음성인 것이다. 그래서 무던할 수 있었던 것. 노아인들 아니 그랬을까? 것도 120년을 속절없이 방주를 지으며 모든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를 받아야 했을 터. 아브라함인들 오죽했겠나? 79세 다 늙은 나이에 뜬금없고 무모한 말씀이라니.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지시하신 땅으로 가라니. 그 가나안을 지척에 두고 들어갈 수 없었던 모세는 또 어떻고!
종종 신앙이란 그 무모함과 어이없음의 총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럼에도 묵묵히 주어진 날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무얼까?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떤 문제로 인식하기보다 주신 바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성품으로 인식하여,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나도 그럴 수 있을까? 그러하길 바라는. 어떤 소망 또는 바람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여호와께서 시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라 명령하신 날에 시내 산에서 이같이 모세에게 명령하셨더라(레 7:38).” 말씀을 기준으로 말씀으로만 산다는 것. “여호와께서 시온을 택하시고 자기 거처를 삼고자 하여 이르시기를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시 132:13-14).” 그러니까 나는 결코 내가 잘할 것이라 장담하지 못한다. 확신할 수도 없다.
다만 주의 성품을 안다. 바로 알기를 더욱 더 간절히 바란다. 주는 선하시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그리하여 내가 나를 전하려는 게 아니라 나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나타내기를 바라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이와 같이 말씀 붙들고 묵상한 것을 글로 적어 되새김질 할 수 있어서 유익하다. 최소한 나의 기도는 내가 쓴 묵상 글처럼만 살아도 감사할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을 위해 일찍 잔다. 다른 생각을 버린다. 일렁이는 마음을 주저하지 않고 내버려둔다. 휘둘리지 않으려는 것이다. 누구보다 내가 나를 알지만 나는 나의 감정에 번번이 넘어지고 자빠지는 삶이었다. 그만했으면 됐다. 다만 이제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살 수만 있기를.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3-24).” 더는 나를 사망의 매는 줄로 끌려가지 않게 하실 것이다. 다만 이제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시 132:7).” 이와 같이 주가 이끄시고 인도하시고 함께 하심을.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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