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니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
레위기 9:6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34:1
습관을 따라 그 시간에 행하여야 할 것을 하는 게 현명하였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 22:39).” 일련의 시간을 보내면서, 혼자 남아 늘 하던 대로 하는 그 시간이 나를 붙들었다. 늘 그 시간에 일어나 말씀을 당겨 앉아 묵상 글을 쓰고, 아침을 먹고, 출근 시간에 맞춰 문을 열고 들어가듯 글방에 나가고, 오전에 하던 일과 오후에 하던 일을 묵묵히 행하였던 것이 유익하였다. 잡생각을 덜고 늘어져 까부라지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예외를 두지 않으려는, 특히 아침에 일어나 이처럼 말씀을 붙드는 일은 귀하다. 이것만큼은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놓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마음을 붙든다. 너무 지나치게 잘하려고도 또는 외면하려고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다만 그 주신 이의 성품을 바로 알 때 묵묵함으로 무던할 수 있었다. 만약에 내가 무얼 하려고 애쓰면 애쓰다가 지쳐 쓰러지기 십상인데, 나는 다만 주시는 날에 주시는 힘을 가지고 주신 일과를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이는 예수님의 자세이기도 하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목적은 뚜렷하였다. 물론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동정하셨고, 저들과 함께 머무셨으며 병든 자를 고치시고 슬픈 자들을 위로하셨다. 하지만 그게 목적이 아니었다. 인류공영에 이바지 하는 게 이유가 아니셨다. 부조리를 타파하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바로 잘 살게 하려는 게 아니셨다.
신령과 진정으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하여 저들을 구원하시려고.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시 16:10).”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두신 관계와 관계는 이를 위해 함께 하는 것이지 그게 목적이고 희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동기 전도사 중 늦어서야 결혼을 한다며 인사를 알려왔다. 저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오전 내내 생각하다 정하였다. 하나님 나라 가는 그 날까지 좋은 배필로, 동역자로 협력하는 사이가 되길. 너무 빤한 이야기 같은데 ‘우리 사이’는 그런 것이다. 자식이 전부일 수 없고 부모가 우선일 수 없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다가 아닌 것이다. 마치 저를 위해 내 전부를 바치는 것처럼 굴곤 하지만 이는 그릇되다. 다만 저와 나는 이 시기를 친밀한 사이로 함께 지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우리는, “모세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니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레 9:6).” 명령을 따라 삶으로, “명령을 지키는 자는 불행을 알지 못하리라 지혜자의 마음은 때와 판단을 분변하나니(전 8:5).” 나는 이 말씀을 그리 받았다. 불행이 없다거나 슬픔과 노여움이 상관없는 삶으로 산다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행하지 않다는 것.
슬픈데 슬픔으로 잠식당하지 않고 노여운데 노여움으로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라고 명하신 것’을 준행함으로 ‘여호와의 영광이 너희에게 나타나리라.’ 그 목적으로 예수님은 오셨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회복시키시려고,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일련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슬프기도 했고 서럽기도 했고 불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럴 뿐 그게 나를 주장하지는 못하게 하셨다. ‘너무 기뻐하는 일도 너무 슬퍼하는 일도 헛되다.’ 우리로 오늘을 살게 하시는 까닭은 기쁨으로 주를 찬송하는 법을 배우게 하시고, 슬픔으로 주께 기도하고 주를 의뢰하는 법을 알게 하신다. 우리가 들어갈 주의 영광의 나라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으로 천사들 앞에서 영광과 찬송을 올리는 날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욜 2:31).” 그런 날이 이르기 전에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32).” 싫든 좋든, 외면하든 주저하든 모두에게 죽음이 이르는 것처럼 죽음 너머의 날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슬픈데 안 슬픈 척 하고 고통스러운데 힘들지 않은 척 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살면서 사는 동안에 우리의 밤은 낮보다 길다. 그러나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1).” 난감하고 두렵고 떨리는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것으로 이미 충분하였다. 이처럼 말씀을 가져다가 삶의 푯대로 삼고 나아갈 수 있는 마음이 귀하였다. 슬프면 슬퍼서 주의 이름을 부르고 기쁘면 기뻐서 주께 영광을 올릴 수 있는 것이 복되었다.
종종 믿음에 대하여 회의하는 아이에게 나는 그리 말해주었다. 믿음이 없다면 회의도 없다. 천국에 갈 자이기 때문에 지옥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처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런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으로 이미 저의 믿음은 확증된다. 정작 두려워할 줄 모르고 의식적으로 외면하고 회피하고 부정하는 자에게는 이보다 미련한 소리가 또 어디 있겠나.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그러므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8).” 나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죽으신 것처럼 반드시 두 번째 다시 오실 것이다. 그 때가 언제인지, 내가 살았을 때인지 죽었을 때인지 알 수 없으나.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3-24).” 오늘 나에게 알게 하심이 귀하다. 붙들고 살게 하시는 말씀이 은총이다. 누가 보기엔 별 것도 아니고 대수롭지도 않은, 별 볼 일 없는 삶 같지만 그것으로 주의 영광을 바라고 위하며 살 수 있게 하시는 것. 그러므로 너무 슬퍼하지도 너무 기뻐하지도 않는, 그 너머 하나님의 은총을 주목하면서.
남들이 뭐라 하든.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이보다 더 확연한 구별이 또 있을까? 더는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여서 말로도 행함으로도 어쩔 수 없는 저에 대하여는 기도할 뿐이니.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8).”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고 보면 교회 장로라 하고 전도사까지 했다 하고 믿는 자라고 하니 더 두려울 때가 있다. 우리의 믿음이란 게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그것으로는 한 줌 영광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발판이 되어줄 뿐인데, 정작 오늘을 또 하루 연장하시는 까닭은 장차 들어갈 저 본향에서의 삶을 예비하는 것이다. 하나님처럼 하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위하여 찬송과 경배를 올리는 삶을 위하여.
그러는 때에, ‘보라 밤에’ 우리는 얼마나 자주 원치 않는 밤을 맞이하곤 하는지. 낮이다 싶어 밝은 길을 가는 동안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밤이 이르러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요 9:4).” 더는 꼼짝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익힌 자세와 마음으로 주를 바란다. 의지하고 구한다. 그 밤에 주의 성소에 서 있는 것으로,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그럴 수 있다.
구구절절 나의 마음을 나열하지 않았고, 뭐가 어쩌고 하며 슬프고 서러웠던 마음을 운운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아예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도 잠시 지나는 것이어서 정작 그것으로 주를 더욱 바랄 수 있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나는 내 곁에서 그런 이를 보았다. 신앙이 좋아 저의 믿음이라면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의 강인한 믿음이었는데, 첫 애가 전신마비로 살아야 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불행 가운데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다.
또 누구는 죽을병에 걸려 그 간절함으로 주께 구하였더니 낫게 하심을 입었다. 한데 어느 순간 간절함은 우연으로, 몇 번의 수술과 완치는 그저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되어 더욱 그 마음은 완고하여졌다. 그러니 뭐라 한들, 하나님을 믿던 자신의 믿음이 정작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내 곁의 또 다른 누구는 아무리 다잡고 붙들고 힘겨루기를 해도 감당이 안 돼 자신을 다만 주 앞에 내어놓고 두 손을 들었다. 저는 울었고 원망하였고 실망과 낙심으로 긴긴 밤을 맞이하였다. 한데 저는 주의 성전에 서 있었다. 술집이 아니고, 정다운 친구도 아니고, 가족이나 사랑하는 친지도 아니고.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2).” 다만 주를 송축함이었다. 송축이란 기리는 일이다. 기린다는 것은 추어서 말한다는 것이다. 추다는 손이나 발, 모든 동작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움츠리듯 위로 올리는 것. 그것이 슬픔이면 슬픔으로, 기쁨이면 기쁨으로, 내게 두신 나의 그것으로 동작을, 삶을 움츠리듯 위로 올려드리는 것이 기리는 일이다. 이에 송축이란 단순하게도 주께 향하여 나의 전부의 표현이다. 저는 누구이신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이시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3).” 시온, 곧 우리가 울라가 들어갈 본향, 그 최종적인 목적을 향하여, 나아가는 날들이 사는 일이었다. 이에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121:2).” 그리하여 오늘은 오늘의 말씀으로 귀하다. 보라 밤에! 주를 바랄 수 있다는 이 놀라우신 은혜.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34: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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