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위기 11:45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36:1
우리를 구별하심이다. 빛과 어둠이 함께 할 수 없고 그리스도와 베리알이 같을 수 없다. 곧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이는 저들과 일을 도모함으로 우리의 영혼이 도로 애굽으로 향할까함이다. 이는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서로 아닌 건 엄연히 아닌 것이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이에 따른 확실한 분리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신 말씀이 종일 든든하면서 새삼스러웠다(고후 6:14-16).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이제는 부끄러움이 되었다는 소리다. 예수께서 오신 것은 이 땅에 평화를 주시기 위한 게 아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이는 분리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5-36).”
경건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불러내어 거룩하게 하심이었다. 오늘 말씀은 이를 상기시킨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몸에 밴 삶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본래 우리는 죄악 중에 출생하였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내가 그토록 귀히 여기는 자식이나 부모나 사랑하는 이에 대하여,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모든 것이 얼마나 헛된가를 새삼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다.
본질상 세상에 속하였고 본질상 경건하지 못한 것을 추구하며 좋아하고 바라고 의지하였던 생활에서, 그 연대감을 끊어내신다. 이는 외딴 삶으로 수도승과 같이 구도의 길을 사는 게 아니다. 더는 추구하는 바가 다르고 본질이 달라지는 일이다. 거룩이란 고대 올림픽선수와 같이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지는 것이다.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행 2:40).”
세상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마음’을 더는 원하지 않는 것으로, 그토록 바라고 위하던 것으로부터의 해방, 구속, 속량이다. 아이의 묵상 글을 잃으며, 가족 중에서 혼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고독한 일인가하는 것을 생각하였다. 결국 그 세상을 이길 이김은 믿음뿐이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그래서 가족을 등지고 외따로이 떨어져서 사는 게 아니라 맡기신 그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7-38).”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이었다. 그래서 메모를 하는데 내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었다.
누구보다 친구를 좋아하고 사람을 따르며 세상을 향하였던 나로서는 오늘의 분리가 때론 이해가 안 된다. 내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싶다가도 이는 성령이 내 안에 계시는 증거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친구들과 시시덕거리던 말이나 함께 어울려 놀던 ‘세상의 마음’을 더는 원하지 않는다. 불편하고 부끄럽고 오히려 아직 거기에 있는 저를 위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얼마나 내가 안 믿는 선생의 이런저런 조언과 그 가치관과 추구하는 삶을 동경하며 살았던가! 저와 어울려 바라보는 세상을 아무 거리낌 없이 즐거워하였던가! 나는 아이의 묵상 글에서 어떤 갈등을 읽는다. 구체적으로 말은 안 하지만 그 의미와 의미가 스며져 있는 어려움을 엿보기도 한다. 한 가정에서 또는 어울리던 친구들 사이에서 홀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게 얼마나 치열한 갈등을 가져오는지!
뭐라고 댓글을 달아줄까, 통화라도 할까 망설이다 그냥 두었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은 묵묵히 지켜보며 기도하고, 함께 하게 하실 때 말씀으로 양육하고 돌보는 일이겠으니! 섣불리 나서서 많은 말을 하느니 가만히 지켜보며 믿어주고 함께 걷는 것이 중요하겠다. 한참 때 누가 내게 그 어떤 말로 이끌고 꾸짖고 야단친다고 해서 그런 말이 들리기나 했었나? 그럼 더 반감만 생겨 더욱 세상에 밀착되곤 했으니까.
세상을 살면서 경건치 못한 것에 치를 떨고 환멸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길밖에 없다. 세상 그 무엇도 표준이 될 수 없다. 목사도 부모도 스승도, 사람은 사람에게 실망만 더할 뿐이어서 일찍이 사도는 증거하였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그만큼 세상이 황홀하고 좋고 또 좋은 게 넘쳐나는데, 그것이 좋을 땐 뭐라 한들 그 부끄러움을 알 리 없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16).” 그것이 우리의 본질이어서 세상과 짝하는 게 자연스럽다. 더 몸에 맞다. 가치나 이상에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17).”
이를 알게 하려고 내 안에 두시는 부끄러움을 이제 나는 사랑한다. 가령 며칠 전 친구와의 통화 내용 중에 다시 끊었던 담배를 피우게 됐다며, 금단 증상으로 우울감이 밀려오는데 꼭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싶다는 말에 나는 공감하였다. 그게 무언지 안다.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세상이었다. 부모가 원수다. 자식이 원수다. 그릇된 걸 알면서도 요구하고 강요하고 그리 내몰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경쟁의 벼랑 끝에 세우는 것이다.
거짓과 부정도 마다하지 않고, 어쨌든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면 된다고 여기면서. 돈돈거리면서 자식들도 돈의 노예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결국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10).” 분명한 가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린 다만 이 땅에서 지나가는 행인일 뿐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11).” 내 안에 이는 정욕을 제하라.
그 목적은 뚜렷하여서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12).”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씀을 정리하다 내가 그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 혼자 있음이 결코 혼자 있는 외로움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저들과 떨어져서 무슨 맛으로 사나싶은데, ‘오직 깨어 근신하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4-5).”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목사가 되고 교회에 속한 삶이어서 얼마나 다행한가. 아이처럼 안 믿는 가정에서 온 몸으로 맞서야 하는 저의 고달픔에 대하여. 믿는 자로 안 믿는 사회에서 저들과 ‘사회생활’로 엮이고 얽혀야 하는 일에 대하여.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6).” 말로는 어찌 위로하고 이끌 수 없는 일이다. 성령이 그 속에 함께 하지 않으시면 어찌 감당이 안 되는 세상이다. 버젓이 술문화가 있고 함께 어울리는 데 있어 그 놀이문화가 있으며, 그러는 중에 사용하고 서로 위로하는 방식과 언어가 있는 것이어서. 아무렇지 않게 저들로부터 분리 된다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회생활을 그만두지 않는 다음에는.
아내는 아들아이가 그처럼 어울려야하고 함께 해야 하는 사회에 대해 염려하였으나, 그러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어찌 아이를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실지 나는 확신하였다. 그 단적인 예로 새로 사귀는 여자 친구의 경우 아이가 그곳 필리핀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어디 빈민가 아이들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봉사를 한다는 말에 나는 안도하였다. 주가 이끄신다는 것. 다스리시고 관여하신다는 일.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8).” 그렇듯 현재의 악한 세상에서 따로 분리시키고 구별하여 세우신다는 데 확신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고후 6:17-18).”
오늘 레위기서의 말씀도 왜 무엇은 먹고 무엇은 먹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은 만지지도 말고 무엇은 성별해야 하는지. 결국 그 이유는 하나였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이라면 무얼 먹든 어떤 것을 함부로 위하고 취하고 그것으로 즐거워하든. 다만 저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니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말씀을 머금고 되새긴다. 내가 어찌 거룩할 수 있겠나?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더욱 더 주의 도우심과 긍휼하심 앞에 나아가나는 것이었으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 136:1).” 곧 세상과 멸망치 않게 하시려고 때론 우리를 징계하시고 강권하심으로 이끄시는,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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