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레위기 10:3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
시편 135:13
우리의 경험이 우리로 우리가 그리스인인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그 선함과 성실함으로도 아니다. 지적으로 넘쳐나고 영웅적인 희생을 자부하는 삶으로도 아니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 더 나은 미래를 개척하는 사람들도 아니다. 봉사와 헌신이 우리로 만족하게 하는 기쁨을 더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삶이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을 힘들게 한다.
다만 우리는 마음에 찔려 어찌할꼬, 괴로워할 줄 앎으로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날마다 그 삶이 더해진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46).” 그러는 것은 사람의 친목을 더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
새삼 놀라운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고 세움을 입은 것이며 날마다 새로워져 가는 일이다. 종종 말씀 앞에서 마음을 졸이고 그 문맥과 문맥 사이에서 숨을 죽일 때가 있다. 오늘 아론은 두 아들을 잃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 10:1-2).”
어찌 보면 나름 한다고 하였던 것인데, 가차 없음 앞에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이에 아론이 어찌 했는지. 슬퍼서 괴로움에 휩싸였는지. 두려움에 놀라 황망하여 했는지. 말씀 앞에 앉아 숨을 죽이고 다음 말씀을 읽었다.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3).”
아론은 잠잠하였다. 어떤 슬픔도 가타부타 어떤 변명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스스로는 거룩하여질 수 없다. 이를 성급히 베드로의 설교로 들으면,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공식과 같은 길은 죄를 느끼고 깨달아 회개하는 것, 이에 용서를 구하고 주 앞에 부복하여 세례를 받는 것, 그러할 때 죄 사함을 받은 증거로 성령을 받는다는 것.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사명이었다. 그 구분에 망설일 게 없다. 왜 아론이라고 감정이 없었겠나? 슬픔으로 괴로워하지 않았겠나? 다만 저는 잠잠하였다.
때론 할 말이 많다. 이 사람 저 사람 붙들고 들려주고 싶은 말도 많고 푸념이라 해도 말들로 위로를 삼고 싶을 때가 많다. 하나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수 6:10).” 우리의 말은 절정에 닿았을 때 외칠 말이다.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저녁에 아내와 딸애는 필리핀에서의 일정을 들려주었다. 어딜 갔고 무얼 먹었고 어떤 일이 있었으며, 아들애 여자 친구가 와서 인사를 했고 애가 어떻고 하면서. 주거니 받거니 여러 말은 말들로 서로 이어지다 뜬금없이 내게 궁금한 거 없어? 하고 되묻는 것이다. 그러게 굳이 궁금하거나 더 듣고 싶은 말이 없었다. 말들로 내가 알 수 있는 저들의 감흥과는 다른 것이다. 조금 의외인 것은 둘째 동생과 손위 처남이 거의 이틀에 걸쳐 서로들 자신들 살아온 이야기를 구구절절 나누더라는 것이다.
그러는 중에 누가 어떻고, 왜 저와 어찌 그리 되었는지까지. 안 해도 될 말이었는데 뭘 그런 거까지 말을 했는가 싶었지만 묻거나 뭐라 할 수 없었다. 말은 종종 말을 함으로 말에 도취되는 경향이 크다. 종종 그러느라 할 소리 안 할 소리가 섞여 굳이 안 해도 될 말들이 더 많아지기도 한다. 돌아보면 그게 또 흠이라. 서로 앞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해하고 알겠다가도 돌아서면 그것이 되레 욕이 될 수 있는.
나는 여러 말을 들으면서 혼자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였다. 궁금한 거 없어? 하고 나의 말없음에 아내가 뜬금없이 물었고 나는 그저 그게 다였는데, 당신 까칠한 거 맞아! 하는 것이다. 종종 누가 내게 차갑고 냉정하대나. 서로 그런 얘기도 하고 저런 얘기도 하면서 그러는 거지하는데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물론 우리끼리니까, 가족이니까, 믿을만한 사람이니까 하고 이 말 저 말 실제는 굳이 안 해도 될 말들까지 하게 되는 게 다반사인데. 나야말로 말을 좋아하던 사람이 아니었나. 남의 말보다 별식 같은 게 또 있던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성경은 일러 이를 경계하였다. 지혜자는 다시 반복하여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26:22).”
원래 그런 것이다. “너희가 남의 말을 꾸짖을 생각을 하나 실망한 자의 말은 바람에 날아가느니라(욥 6:26).”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가, 전에처럼 궁금하지도, 별로 듣고 싶지도 않은 말들이 의외로 넘쳐나는 것이다. 늙으면 늙어서 할 말이 많고 어리면 어려서 돼도 않는 말들이 많다. 그런 것이다. 아무리 그게 어떻다 해도, 더욱이 목사나 교사로 들은 누구의 말은 더욱 조심스러워서 함부로 옮겨서는 안 된다. 저가 누구이든, 당장은 믿을만한 사람 같고 심지어는 가족이라 해도.
입술의 말은 불의 혀와 같다. “만일 누구든지 입술로 맹세하여 악한 일이든지 선한 일이든지 하리라고 함부로 말하면 그 사람이 함부로 말하여 맹세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가 깨닫지 못하다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는 그 중 하나에 그에게 허물이 있을 것이니(레 5:4).” 그리하여 함부로 들내지 않는 것. 아론은 잠잠하였다. 두 아들이 죽었다. 어찌 됐든 주의 일을 한다고 하다 그리 되었다.
모세가 말한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에 아론은 잠잠하였다.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았다. 설마 두 아들을 잃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그럴 리 없다. 슬프고 원통하고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시 135:14).” 부쩍 말씀에 말씀을 더하시는 대목이 그래서 더욱 주의 성품을 의지하게 하신다. 모든 문제는 문제에 답이 있는 게 아니라 문제 너머에 주의 성품이 있었다.
이를 의뢰하는 일. “여호와여 주의 이름이 영원하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를 기념함이 대대에 이르리이다(13).” 어떠하든, 때론 내게 부당하고 억울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가만히 잠잠히 주의 성품을 되뇌어 묵상하는 일. 나는 아론이 그러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모세가 그 말을 듣고 좋게 여겼더라(레 10:20).”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자들이었다. “여호와의 집 우리 여호와의 성전 곧 우리 하나님의 성전 뜰에 서 있는 너희여(시 135:2).”
다만 그 속을 어쩌나. 말은 못하고 힘에 겨워 신음하면서 괴로움이 엄습할 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위로는 하나님뿐이다. 결코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된 게 아니듯이 우리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 이가 우리로 주의 위로를 받게 하신다. 이로써 하나님도 위로를 받으신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판단하시며 그의 종들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으시리로다(시 135:13).” 이 모두는 하나님의 주도하심이었다.
그 이유와 목적은 하나이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당장 어떤 슬픔이 또 노여움이 나의 영혼을 휘감아 짓누르는 것 같아도, 그것으로 이루시는 주의 놀라운 구원 사역이 있었으니.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고, 받고 있으며, 받을 것이다. 이 모두는 받는 것이지 내가 이루는 게 아니었다. 받게 하실 구원에 대하여는 우리가 소망하고, 받게 하신 구원에 대하여는 믿게 하시며, 받고 있는 구원에 대해서는 사랑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찬송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며 그의 이름이 아름다우니 그의 이름을 찬양하라(시 135: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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