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
레위기 26: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시편 1:1-2
내 안에 화가 많은가보다. 종종 생각보다 심각함을 느낀다. 어찌 다스릴 수 없는 생각이 많고, 끝 간 데 없는 생각들은 불안을 조장한다. 사사로운 일에 억지스런 상상을 더해 스스로 비련의 역할을 한다. 그래도 되는 사람인 것처럼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퉁명스럽고 불친절하다. 차갑기 그지없다. 가령 누가 불쑥 들어와 어디 상표를 대며 홍보할 때 눈길도 주지 않고 거절해서 돌려보낸다. 어디서 모르는 전화가 걸려오면 뒷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끊어버린다.
불쑥 튀어나온 나의 야멸친 행동들이 스스로도 무안할 정도이다. 이를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부끄럽다. 내 안에 풀리지 않은 수치심이 가득한 것을 느낀다. 어쩌면 도저히 풀릴 수 없는 것이어서 수치감이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디 좀 더 알아보자 싶어서, 존 브래드쇼의 <수치심의 치유>라는 책을 주문하였다. 말씀 앞에서는 안 그럴 것 같은데 돌아서기 무섭게 돌변하는 나의 어린 자아에 나도 낯설기만 하다.
이를 오늘 본문으로 읽어보면,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지니 조각한 것이나 주상을 세우지 말며 너희 땅에 조각한 석상을 세우고 그에게 경배하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6:1).” 수치심이란 내 안에 내가 지니고 놓지 않으려 하는 우상이다.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어하는 잔망스러움이 마치 그래도 되는 것처럼 스스로를 위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를 마구잡이로 표출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를 꽁꽁 싸매고 혼자 숨겨두고 사는 것도 문제다. 이를 자아라고 하는 우상이라 여겨도 되겠다. 다 그렇지 뭐, 하면서 스스로를 두둔하고 그래도 된다고 여기는 한 이와 같은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놓고는 그런 자신이 부끄럽고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어하고, 그 응어리진 감정이 그야말로 수치심 덩어리가 되는 것이겠다.
마비 된 영혼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 1:1-2).” 오늘 말씀은 그런 나의 증상을 들추고 환부를 치료하신다. 본래부터 악인이다. 자라온 환경이나 여건이 나를 그리 만든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갈구하는 것이 ‘다오 다오’ 한다. 끝이 없는 것이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잠 30:15).” 족하여도 족한 줄 알지 못하게 하는 두 딸이 수치심이다. 자꾸 악인이 꾀를 낸다. 생각을 더해서 그러고 있는 자신을 엄호하는 것이 ‘죄인들의 길’이다. 한 마디로 ‘다 그래’ 하고 여기는 마음이다. 다들 그러고 산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하는 식이다.
그처럼 족한 줄 알지 못하는 것 서넛을 더 보자.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16).” 끝이 없다. 되풀이되는 게 여간 들러붙는 게 아니다. 그림자 같다.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구분된다. 악인의 꾀를 쫓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으려 한다. ‘내가 알아서 할게.’ 하는 자리가 오만한 자의 자리다.
내 안에 거듭 이는 ‘악인의 꾀’와 늘 같은 길에 선 것 같은 ‘죄인들의 길’과 그럼에도 스스로 알아서 할 것처럼 괜찮다고 여기는 ‘오만한 자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말씀을 즐거워하며 이를 주야로 묵상하는 것이다. 이를 ‘복 있는 사람’이라 하였으니 이처럼 말씀 앞에 앉을 수 있는 것 자체로 귀한 일이었다. 40여 년 앉은뱅이로 있는 이가 구걸을 하러 교회 앞에 앉았다. 저는 그래도 교회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한다. 마침 그 길에 베드로와 요한이 섰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우린 누구에게 은과 금을 주는 것으로 다가 아니다. 그것만으로도 족한 줄 알 때 위선이 또는 거짓이 진짜보다 진짜 같다. 하루는 의식 있는 신부가 금은보석으로 장식한 화려한 성당을 쳐다보고 젊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말했다. 토마스, 이러니까 우리는 줄 수 있는 은과 금이 없구나! 그러자 토마스는 말했다. 일어나 걸으라! 하지도 못합니다.
잃어버리고 사는 게 너무 많은 듯하다. 나름 그 허전함을 선행으로 위안 삼고 스스로 괜찮다고 치부하려는 것 같다. 초딩 아이들이 진단평가 때문에 못 오고 중딩 아이도 둘만 왔다. 오붓하니 앞에 앉히고 글을 쓰게 했다. ‘쓰고 싶은 걸 쓰지 말고 써야 하는 걸 써라. 쓸 수 있는 걸 쓰지 말고 쓸 수 없는 걸 써라.’ 쓸 게 없다고 투덜거리는 녀석에서 뭐라 설명하다 그리 말하였다. 툭하면 생각이 안 나요, 하는 아이에게 ‘생각은 나는 게 아니라 하는 거다.’ 하고 말해주었다.
오늘 말씀이 그 답을 제시한다.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하여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애굽 땅으로부터 그들을 인도하여 낸 그들의 조상과의 언약을 그들을 위하여 기억하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26:45).” 하나님이 하시고 하셔야 하고 하시고 있는 기억에 대하여,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모세를 통하여 세우신 규례와 법도와 율법이니라(46).” 하나님도 말씀을 붙들고 일하신다.
베드로가 말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우리에게 있는 것을 줘야 하는데, 있는지도 모르면서 살거나 있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살면 소용이 없다. 어쩌면 우리 안에 더 깊은 곳에는 오만한 자의 자리가 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하는 자기 판단이다. 그 미련해 보이는 것을 붙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 가치는 하늘과 땅 차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이를 알지 못함으로,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27).” 나 같은 이가 뭐라고 감히 누굴 함부로 대하고 뭐라 무시할까. 결국은 내가 당했다고 여기는 화다. 분이고 한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28-29).” 그러니까 왜 베드로 사도가 ‘나사렛’을 유독 강조하였는지 알겠다. 내 안에서 나를 무시하는 것이 수치심이다. 왜 그렇게 하는지, 그래서 어쨌는지, 좀 더 들여다보고 싶어서 책을 새로 주문하고 말씀 앞에 앉았다. 하나님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행위도 강요하지 않으시는데 어째서 나는 나를 들들 볶는 것일까?
이내 말씀은 내게 의사가 필요한 것을 알게 하신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복 있는 사람은 그래서 자신이 악인의 길을 좇고 있으며 죄인들의 길에 서며 오만 자의 자리에 앉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이다. 이를 병으로 여겨 구걸이 아닌 구명을 해야 한다.
우리가 이미 선을 다 이루어서 선한 게 아니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곧 우리의 형통함은 나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주 앞에 내어놓는 것에서이다. 이에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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