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온전히 맡겨진 자들이니라

전봉석 2019. 3. 12. 07:17

 

 

 

너는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기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아론에게 온전히 맡겨진 자들이니라

민수기 3:9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편 5:11

 

 

 

어제 말씀이 어제 한 날의 의지가 되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그를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4:3).” 은혜는 항상 그때의 것이다. 오늘의 언어가 따로 있는 것과 같다. 지난 은혜로는 살 수 없다. 그것은 감사일 뿐이다. 주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도 우리로 의의 길로 행하게 하신다.

 

얼핏 들으면 참 이기적인 것 같은데 가만히 묵상하고 있으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에 내 기분이나 그때의 상황에 따라 한다면 죽 끓듯 하는 데 별 수 있나? 얼마나 가증하고 다중인격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그러니 하나님이 하나님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셨다.’는 말씀이 이제는 천만다행으로 들린다.

 

점심께 아들이 전화를 했다. 헝가리에 있는 대사관에 신청을 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었다. 너무 멀다. 느낌도 멀고 실제 거리도 너무 멀었다. 장성하여 자신이 무얼 선택하고 그리 행하는 것이니 뭐라 내가 할 건 아니고, 다음 주까지 신청을 할지, 결정해야 한다고 하니. 기도하고 마음 주시는 대로 하자고 일렀다. 회계 쪽 일을 공부하려 했는데 마침 총무과이고, 전에 의대 지원을 할까 할 때 학비나 물가가 싼 곳을 찾다 헝가리를 먼저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16:3).” 우선 내 생각이나 여러 계획이 우선이 아니라, 그런 모든 행사를 주께 맡기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9).” 그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앞서 우리는 급작스럽게 방향을 틀고 일을 비틀어놓으시는 하나님을 체험하였다. 그리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셨다. 당장은 그게 마뜩치 않고 석연치 않아도 모든 행사를 주께 맡기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 곁에 끌어들이고 싶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같이 어울려 살고 싶다. 통화를 끊고 인터넷을 뒤져 헝가리를 찾고 그 주변을 살펴보았다. 면적과 인구수와 종교와 문화를 찾아 읽어보았다. 전에는 그저 한 점에 불과하던 나라가 초미의 관심국가가 된 것이다. 어찌 결정하든 주께 묻고 또 의뢰하고 결정하자. 그리 일러놓고는 종일 내 마음이 뒤섞여 우울하였다.

 

얼마나 나 자신이 다중적인지. 마음은 또 저 혼자 슬픔에 젖어 자꾸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어떤 신세한탄 같은 마음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나의 눈에 들어온 말씀이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28:17).” 야곱이 노정에서 하나님의 집을 선포하고 그에 거하는 것이 놀랍게도 은혜가 되었다. 붓을 적셔서 다시 천천히 옮겨 적었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눈물이 핑 돌고 마음이 얼얼하였다. 두어 장을 천천히 적어서 벽에 붙였다. 그리고 여러 번 되뇌어 읽었다. 거기가 어디든, ‘이 곳이여!’ 거기가 하나님의 집이었다. 하늘의 문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막연한 이상이나 추상의 이름이 아니다. 저는 실제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3:6).” 그리 말씀하신다. 곧 나의 하나님, 아들의 하나님이시다.

 

누구의 어떤 역사와 이상의 대상이 아니다. 실제 이 곳에서나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오늘 나를 지명하여 부르신 것이다. 어쩌다 내가 아니다. ‘어쩌다 어른은 없다. 누구보다 나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시다. 저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 고통을 아시는 이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7).”

 

그저 막연하게 머리로 아는 앎의 정도가 아니다. “내가 너보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하게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45:2).” 우리로 지나게 하신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중에 우리에게 숨은 보물을 주어 저가 우리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신다.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3).”

 

감상적이고 물러터진 나의 마음은 괜한 슬픔에 젖어 종일 서성거리듯 글방 안을 맴돌았다. 혼자 그 먼 타국에 나가 생활해야 하는 걸 생각하면, 그 외로움이 어떨지 목이 메어서. 그냥 해보는 소리야! 하고 전제하였지만, ‘지금 사귀는 아이와 서둘러 결혼식을 하고 같이 가면 안 돼?’ 하는 말이 엉뚱하게도 툭 튀어나왔다. 살면서 사무치는 외로움에 대하여 나는 숨이 막혀서 하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나의 말에 별다른 대꾸는 않았지만 그 속이 또 오죽할까!

 

그런 우리의 심정을 주가 위로 하신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3:8).”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물론 그 모든 일을 앞서서 치르시고 이루시는 데 대해 생각하였다.

 

그 이루고 계신, 앞서 다 이루신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3:21).” 그 종으로 아들 예수를 세우셨다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13).” 다시 말해 나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 곧 우리의 부르짖음은 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께 향한 것이다. 그 아룀이 예수의 이름으로 드려진다.

 

저는 앞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말씀을 붙들다보면 오늘 이 한 날의 모든 소소한 이야기가 어느 것도 버려질 게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 그것이 타락과 죄악으로 물들었다 해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2).” 그 위에 운행하심은 주관자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3).”

 

빛이 있으라.’ 하심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5).” 그 길은 오로지 하나인 것을 알게 하신다. 이런저런 마음의 조작은 나의 고질적인 신경증일 수도 있고 돼먹잖은 수치심으로 내면화된 성격장애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어떻든 그 흑암과 공허와 혼돈의 모든 것들 위로 하나님이 운행하신다. 이를 알고 붙든다는 게 특별함이다. 구별된 자의 어마어마한 은혜다. 나 같은 게 어찌 주의 이름을 부를까!

 

뒤집어서 말해도, 우린 결코 하나님에게서 달아날 수 없다.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저는 변개가 없으시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1:17).” 나는 이것이 천만다행이란 소리다. 내가 해야 하고 내가 이뤄가야 하는 구원이었다면 어림도 없다.

 

누구보다 유약한 나로 주 앞에 설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들 이야기로 울컥울컥하면서 종일 마음이 어려우면서도, 그래서 더욱 주를 바랄 수 있었던 것을 오늘 말씀은 이렇게 정리해주는 것 같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5:12).” 그러므로 너는 레위인을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맡기라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아론에게 온전히 맡겨진 자들이니라(3:9).” 영적으로 우린 레위인의 삶을 사는 자들이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주가 이루어 가시는 일들이라. 맡겨진 우리는 주가 다루신다. 주의 행사가 우리 삶을 운행하신다. 어떤 어려움이나 서글픔이 우리를 짓누르는 것 같다 해도, 그래서 다만 주께 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5:11).” 이와 같이, 말씀 붙들고 삽시다.

 

저녁에 아이 엄마에게 카톡으로 말해주었다. 녀석이 여섯 시 퇴근 시간인데도 연락이 없었다. 카톡을 여러 개 남기고 심지어 전화를 아무리 해도 받지 않는 것이다. 가슴이 덜컹했다. 핸드폰을 잃어버렸나?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나의 불안증은 예민해져 더더욱 불안을 키워가는 중이었다. 일곱 시가 돼도 연락이 없었다. 그런 적이 없는데, 나의 조바심은 아들 이야기로 감상에 빠져 있던 나를 현실로 끌어냈다.

 

참다못해 아이 엄마에게 혹시 무슨 일이 있는가, 카톡을 했고 아이는 여덟 시를 넘겨서야 연락이 닿았다. ‘목사님 오늘 잔업이 많아서 야근했어요!’ 갑자기 어떤 서러움이 또 노심초사하던 마음이 진정이 되었고 뒤늦게 아이엄마와도 카톡으로 확인하고 위로하였다. 우린 다만 주만 바라며 말씀 붙들고 살 뿐입니다! 힘내십시오! 하고 보낸 말이 나에게 위로가 되어 돌아왔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5:1).”

 

우리가 누구에게 하소연하고 부르짖어 우리의 서러움을 또 우울함을 위로 받을 것인가.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2).” 기도밖에 없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3).” 그리하여 말씀 붙들고 가는 길이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28: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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