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와 아론이 지명된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민수기 1:17, 54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시편 3:5
주가 지명하여 불러 세우셨다는 말씀 앞에서는 언제나 숙연하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다만 우리, 모세와 아론은 ‘지명된 이 사람들을 데리고, 명령하신대로 행할 뿐이다.’
죄로 뒤틀린 우리의 감정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내용 없는 의지’만 잔뜩 키워놓는다. 의지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아닌데도 할 수 있다고 우기는 마음과 그럴 경우 자신이 다 통제하려 들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최면에 걸린다. 그러다 이루지 못해 초라하고 충동적이었던 자신의 무모함을 가리기 위해 세상을 탓한다. 항상 극단적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을 고집하면서 말이다.
곧 주의 명령에 따라 그 말씀대로 행할 때는 모르는데, 말씀에서 어그러져 자기 의지로 무얼 하려 할 때는 어김없다. 늘 나는 그렇다. 오늘 말씀은 그런 나를 불러 세워 내가 오늘 여기에 있는 것이 주가 지명하여 부르신 것임을 상기시킨다. 너는 내 것이라! 알게 하신다. 아이가 모처럼 토요일 출근을 안 해도 되는 날이라며 일찍 글방으로 왔다. 공들여 일주일 동안의 일기를 쓰게 하였다. 말은 더 맥락이 없었고 주위는 더욱 산만해졌다.
같이 시편 74편을 읽었다. 그런저런 어려움이나 사정에 대하여,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16-17).” 아이와 함께 이 말씀을 여러 번 되뇌며 그 의미를 되새기고 캘라그래피로 써보았다. 낮도 주의 것이고 밤도 주의 것이다. 기쁨도 주의 것이고 슬픔도 주의 것이다. 우리의 어려움도 주의 것이다. 이를 마련하신 이가 그 경계를 정하셨다. 그것은 결코 우리를 침몰시킬 수 없다. 여름을 만드신 이가 겨울도 만드셨다.
우리는 그래서 이들 모두에도 자유하다.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아이에게 설명을 하면서도 자꾸 엉뚱한 답변을 하는 아이를 보는 게 아니라 그리 서로 두시는 하나님을 생각하였다. 점심께 딸애가 아내와 같이 나와서 짜장면을 사주었다. 은연중에 아이의 식탐을 눈여겨보았다. 결국 다 먹지도 못하면서 탕수육을 자기 앞에 여러 개씩 가져다놓았다.
돌보고 위하여 주께 바라는 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는 베드로의 항변을 역설적으로 들을 필요가 있겠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2).” 저들은 40년 가까이 앉은뱅이로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앉은뱅이를 고치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6).”
우리는 은과 금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다. ‘일어나 걸으라.’ 다만 그리 명하고 전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단지 저의 앉은뱅이라는 장애만 염두에 두고 선을 행한 게 아니다. 이는 우리 마비된 영혼을 향한 외침이다. 사람들이 놀랐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저가 일어나 걸으며 뛰기도 하니까 놀란다(7-8). 이를 본 이들이 그것으로 놀라니까 베드로가 하는 소리다.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한 게 아니다.’
내가 아이를 대하면서 아이의 그러저러한 사정을 딱하게 여겨 그것만 보고 하는 일이 아니어야 한다. 이를 알고부터 나는 더 이상 아이의 횡설수설 맥락에서 벗어선 대답과 엉뚱한 논리에도 당황하지 않는다. 산만하고 뭔가 불안해하는 저의 몸짓에도 이젠 무난하다. 이런 소릴 해봐야 뭐하나, 이런 설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고 회의하지도 않는다. 이를 '지명하여 부른 이'가 따로 계시다. 오늘 우리로 서로에게 두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안다.
저가 낮과 밤을 주관하신다.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다. 우린 이것도 저것도 잡으려하지 않는다. 다만 주를 경외함으로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슬픈 일에도 너무 슬퍼할 거 없다. 기쁜 일에도 너무 기뻐할 것도없다. 너무 기뻐하거나 슬퍼할 때 우리의 감정은 뒤섞여 난데없이 뿌연 부유물이 의식을 흐려놓는다. 약을 더 먹게 되고, 피로가 쌓여 아이의 몸 상태는 더 곤죽이 되는 것 같은데, 그것까지도 주를 의뢰하게 한다.
내게 두시는 어떤 회의와 갈등도 유용하다. 수치심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다. 그것으로 조신하고 경계하여 함부로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다. 주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으로 항상 더 주의 도우심만을 바라게 된다. 죄의식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없애야 하고 멀찍이 떨어뜨려야 하는 게 아니다. 그것으로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를 구한다. 우리 심령은 가난하여져 애통함으로 온유한 자로 마음의 청결을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게 없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5).” 오직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 그런 거 보면 어릴 때 취하는 부모의 역할이 얼마나 귀하고 또 소중한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이는 단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혼이 무슨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예사로운 듯 여겨지는 분위기지만, 아이의 영혼은 그것으로 비틀려 마비가 된다. 어찌 그것으로만 원인을 찾을 수 있겠나만.
나는 존 브래드쇼의 <수치심의 치유>를 읽으며, 부모로서 얼마나 함부로 아이들을 양육하였는지 회개하였다. 나의 폭언과 잦은 짜증과 지나친 간섭과 몰인정과 과도히 엄격한 훈육은 역으로 나의 병든 영혼이었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이만큼 건실하게 주 안에서 성장하여 준 것은 모두가 주의 은혜라. 서로 늘 으르렁거리며 살면서도 이혼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미숙하게 대처하긴 했어도 아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어설프지만 다시 사랑을 시도하였던 것이 유익이었다.
원인의 가장 큰 비중이 부모의 하나님 없는 삶인데, 저들의 내용 없는 의지가 자신들의 영혼뿐 아니라 자녀들의 영혼까지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다 그런 건 아니야, 안 믿는 부모들도 나름 얼마나 아이들을 잘 키우는데? 하고 반문하는 이도 있겠으나, 과연 그런가? 그리 자식에 대해 자신하는가? 자신에 대해 자부하는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찌 우리가 알겠나!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나는 이제 아이가 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다. 저의 횡설수설이나 어떤 터무니없는 무논리의 언어에도 개의치 않는다. 그것은 주가 주도하시는 모든 관여와 섭리에 따른 것임을 확신한다. 그리 두신 것이라.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마 13:29).” 나는 더 이상 누굴 치유하고 낫게 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내 문제를 내어놓고 해결 받는 데 주안점을 두지도 않는다.
아뢸 뿐이다. 아뢰고 아룀으로 어느덧 주의 뜻과 그의 긍휼하심을 알 때까지,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나의 감정이나 내 생활의 여러 현상은 단지 지나는 것일 뿐이어서. 오늘 아침, 말씀으로 다시 주목하게 하시는 대목이 '주께서 지목하셨다'는 데 있다. 내가 선별하고 가려서 선택한 일이 아니다. 외로우면 외로움도, 아무런 진척도 보이지 않는 무모함이면 무모함도, 오히려 역효과가 나서 더 일을 그르치는 그르침이라 해도! 더 나은 쪽은 아직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병든 자로서 의사를 필요로 할 뿐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타는 목마름으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바랄 뿐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길은 없다. 더 좋은 수도 없다. 다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 7:38).” 어떻게 해서 그리 될 수 있는지, 나는 이제 그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지명하여 부르셨고, 저 아이를 내게 두셨다.
이 환경과 여건을, 낮과 밤을, 여름과 겨울을 오늘 여기에 두셨다. 아이가 쓰고 우리가 여러 번 같이 읽은 말씀이 새삼 오늘의 푯대가 되었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 74:16-17).” 이 얼마나 감사하고 또 다행한 일인지. 이보다 더 귀한 게 또 있을까? 오늘 시편의 말씀은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치며 아버진 된 다윗이 지은 시이다.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로 아름답고 진귀하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3).”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그와 같은 고백이 드려질 수 있을까?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4).” 주의 응답은 내가 원하는 무엇으로가 아니라 ‘주의 성산에서다.’ 나는 낫기를 바라고, 일이 해결되길 구하며 보다 나은 삶을 갈구하고, 꼬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간구하지만 주는 주의 성상에서 응답하신다.
곧 오늘 우리의 어려움이 주의 성산으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5).” 그 어떤 환경과 여건도 더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6).” 이에 결국은,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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