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
레위기 27:33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편 2:7
무엇도 허튼 게 없다. 허투루 다룰 생은 하나도 없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오늘 본문은 성소의 세겔로 그 값을 정해주고 있다. 무엇이 더 낫고 어느 게 더 귀한지를 가르는 게 아니라 그 자체로 모든 게 값을 다할 뿐이다. 아직 어리면 어려서 값이 있고 나이 들어 늙으면 늙어서 값이 있다. 여자와 남자도 값이 있고 각각은 그 자체로 귀하다. ‘둘 다 거룩하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어서 말이다. 집이나 가축도 같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게 영성이다. 가장 사람이 사람다울 때가 자유로웠는데, 처음 사람 아담은 사람 이상의 사람이 되고 싶었고 거기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가 깨지면서 든 첫 번째 감정이 수치심이다. 전에도 벗고 있던 것이 이제는 부끄러움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지지 못한 모든 감정은 신경증으로 또는 성격장애로 내면화된다. 남 탓을 하면 성격장애이고 자기 탓을 하면 신경증이다.
죄가 주는 혼란은 절망감, 소외감, 자기회의, 고독, 편집증, 정신분열증, 강박장애, 완벽주의, 뿌리 깊은 열등감, 부적당함, 경계선 성격장애와 악성 나르시즘을 일으킨다. 카우프만은 이를 수치심이 내면화될 때 생겨나는 혼란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의 고질적인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생긴, 죄의 결과이다.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절대적 자아, 모든 선의 이데아로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강조하였다. 곧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란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결코 우린 우리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전 1:21).” 어느 것도 허투루 만드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이 값을 정하셨듯이 하나님이 찾아오셨고, 불러내셨고, 자신을 계시하셨다. 결코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그렇듯 오늘 말씀은 그 값이 있고 그 값을 다할 때 정직한 가치로 존재하는 것을 일깨우신다. 그러므로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레 27:33).” 바꾸지 말고 바꾼다면 바꾼 것 둘 다 거룩하다. 무를 수 없다. 하나님이 그저 하나님으로 궁극적인 선의 개념이 아니다. 존스 목사의 말처럼 철학이 가장 교회와 적이 된다. 하나님을 따로 놓고 이를 개념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를 번번이 허문다.
그 값을 매긴 것은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이 그냥 아브람으로 있었다면 무슨 의미도 아니다. 저가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 인해 의미가 되었다.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신 것처럼 오늘을 살면서 나의 하나님이 되심으로 인격적인 관계는 형성되고 그 값은 온전히 성립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체이심을 사람을 지으실 때부터 분명히 하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나’가 아닌 ‘우리’다. 그 우리 속에 우리를 포함시키시는 게 관계다. 그래서 우리의 복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소리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행 3:13).” 막연한 섬김의 대상이 아니다. 우주 만물의 어떤 기운, 궁극적 선의 개념이 아니다. 바로 나, 나로 하여금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시려고.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14:15).” 바울과 바나바를 헤르메스 신과 제우스 신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외치는 바울의 절규다. 베드로도 절규하였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2).”
어딘가 오늘 날 교회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어느 목사를 추모하고 누구 추기경을 높이며 ‘개인의 권능과 경건’을 가지고 교회를 주목하게 하려 드는, 이벤트 같은. 결국 우리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문제로 끝난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훼손되면서 우리 속을 휘감은 감정의 소용돌이와 같다. ‘나는 철학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만났다.’고 한 위대한 수학자 파스칼의 고백도 같은 맥락이다.
각자 저마다의 ‘불붙은 가시떨기 나무’가 있을 터인데, 이와 같은 체험이나 사건이 소중한 것은 그것으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비로소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은 엄청난 일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글을 읽고 존 브래드쇼의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고개를 끄덕거렸고 메모를 하고 포스트잇을 끼우고 밑줄을 그으며, 이 아침 하나님 앞에 드려진 나의 값이 얼마나 귀한가를 새삼 절감한다.
고로 ‘내가 너를 낳았다. 너는 내 아들이다.’ 하시는 말씀이 나를 향해 크게 들리는 것 같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이는 곧 내가 하나님의 아들과 온전히 입맞춤하는 것으로 내게 더하신 명령이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12).”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레 27:34).” 김춘수의 <꽃>이란 시로 이해하자면, 하나님이 내게 오시고 내 이름을 불러주심으로 비로소 나는 의미가 되었다. 모든 값은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시작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사람의 값을 여호와께 드리기로 분명히 서원하였으면 너는 그 값을 정할지니(2).” 누군 한 달란트, 누군 두 달란트, 누군 다섯 달란트로 그 값을 다하게 하시는 것이겠다.
말씀 앞에 앉아 생각을 다할 수 있는 게 귀하였다. 더욱이 내 안에 여전한 수치심의 여러 갈래를 찾아 마주하고 이해하는 일은 새로웠다. 그게 다 내 이야기 같다. 성경의 아브라함 이야기가 모세 이야기가 베드로와 바울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로 읽혀지고 다가와 내 안의 내면화된 수치심과 부딪칠 때의 폭발이 엄청난 것 같았다. 그랬구나, 그래서 내가 그랬구나! 하나님은 나를 일깨우신다. “그 우열을 가리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무르지 못하리라(33).”
어떤 경우에도 무를 수 없는 게 생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시 2:1).” 내 안의 온갖 모색이 절망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훼손하였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하는 베드로의 항변이 귀하다. 그런데 이를 모색하여 교회 외벽을 꾸미고 각종 눈길을 끌만한 구제와 선을 행하고, 은과 금을 내어주면서 가짜가 진짜보다 진짜 같았으니, “온 섬 가운데로 지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인 마술사를 만나니(13:6).”
세상이 미쳐 날 뛰는 것처럼 우리 안의 여러 감정이 뒤엉겨,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분리에서 오는 수치심으로 영혼의 장애와 마비를 가져오는 것이다.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2).” 결국 나는 그 누구도 회심시킬 수 없고 돌이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
나를 여기 두시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찌 인도하시고 계신가를 알면 알수록 결코 내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다만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3:16).” 예수로 말미암아! 그러므로 기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소소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내주임재하심이었다. ‘나의 하나님’으로 계신 것.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아이가 문자를 했다. 오늘 회사 안 가요. 일찍 갈까요? 하고 물을 때 드는 어떤 반가움, 또는 귀한 마음.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엄연하게 여겨지는, 하나님이 오늘 나를 낳으셨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12).”
고로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8).” 어디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어떠하든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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