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전봉석 2019. 3. 17. 07:21

 

 

 

아론이 그리하여 등불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도록 켰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

민수기 8:3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10:14

 

 

오래된 사진 속의 나는 반가우면서 낯설다. 지금에서 보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여러 사람들의 표정이 어렵다. 누구를 떠올리며 한참씩 궁금해 한다. 단체 졸업사진 속에서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누군 있고 누군 없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13:7).” 말씀을 되뇌며 한참 생각을 모두고 있었다.

 

아이가 오전 일찍 왔다. 피곤해하니까 출근하지 말라고 했는가보다. 길게 한 편의 글을 썼는데, 점점 더 무슨 말인가 알 수가 없었다. 어휘와 어순이 뒤섞여 한 문장은 끝도 없이 늘어지고 길어졌다. 같이 소리 내어 읽다 아이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일련의 생활을 글로 쓰는 일은 말로 하는 것과 달리 그 순서와 의미가 가지런해지는 법인데, 나는 그저 잘했다고 하고 이어서 성경공부를 하였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75:1).” 이 한 구절을 여러 번 옮겨 적었다.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하는 것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무엇이 더 가까운지. 엄마? 친구? 게임? 노래? 그 무엇보다 주의 이름이 가깝다는 것! 저절로 엄마, 하고 달려가는 어린아이를 연상하며, 같이 옮겨 적는 동안 마음이 새로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 일로 아이엄마나 누구와 의논을 하고 싶을 정도로 더 횡설수설 그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은데, 뭐라 언질을 해도 다들 개의치 않는 것 같아 더는 뭐라 할 수도 없어서. 같이 붓을 적셔가며 몇 번이고 쓰고 또 쓰며 가슴에 새기게 하였다. 우리가 감사할 것은 돈도 명예도 출세와 성공도 아니고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다. 이는 참으로 귀한 증거여서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는 감동이었다.

 

아버지는 누구의 아들 명예회복이 이뤄지는 국립묘지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오셨다. 17년 만에 군의문사조사위원회에서 저의 사고사를 자살로 위장했던 오명을 벗겨주었다. 그 세월 동안 원통함을 가슴에 품고 살았을 이들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다시 보면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새삼 이보다 더 가까운 말씀이 또 있을까?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저와 같은 일에서 우리는 더욱 말씀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겠다.

 

그리고 오늘 말씀을 가져오면, “아론이 그리하여 등불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도록 켰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심과 같았더라(8:3).”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가 새롭게 이해가 된다. 설령 저 아이가 알아듣지 못한다 해도, 횡설수설 자신이 한 말도 그 의미를 다 알지 못한다 해도, 그럼에도 우리는 명령하심과 같이 등불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는 사람들이다. 늘 같은 자리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귀한 사명이라.

 

17년이나 하는 긴 시간을 가슴에 묻고 씨름하였을 어느 부모들의 원한을 생각하였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10:14).” 주밖에 우리의 마음을 알아줄 이가 누구인가! 그저 다만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17).”

 

주가 들으시고 귀를 기울이신다. 그리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18).” 그렇듯 예수 그리스도를 하늘이 마땅히 받아두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3:21).” 외형적으로 저는 죽었다. 손 한 번 제대로 못 써보고 무기력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런데 성경의 증언은 새롭다.

 

그 일은 영원 전부터 계획된 일이다.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짓기 전의 예정하심이다.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이를 증거하셨다.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죽으신 예수는 부활 승천하시고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었다.’ 이를 아는 우리로는 주의 이름을 가까이 한다. 가까이 하면 할수록 주의 뜻은 더욱 선명해진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하는 약속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20).”

 

하늘에 계신 이가 어찌 우리와 함께 하실까? 이는 우리로 주의 이름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고 이끄신다. 언제까지? 세상 끝날까지!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 그리하여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3:21).” 이와 같은 말씀을 앞에 두고 아이와 앉아서 붓을 적셔 글자를 썼다. 여러 번 되뇌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우리가 감사하고 감사함은 다른 게 아니다.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다. 전에 더 가깝던 것들로부터 놓여난 자유를 느낀다. 더는 친구에게 연연하지 않고 돈과 명예와 나름의 수고와 애씀에도 연연해하지 않는다. 순간순간 우울하고 좌절하여 마음은 끝 간 데 없이 근심에 사로잡힐 때도 있지만, 그래서 또한 주의 이름을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 아이가 이 말을 알아듣기나 하는 것인지! 자꾸 엉뚱한 소리로 답을 하고 전혀 이치에 맞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지만!

 

아버지는 뜻 깊은 자리의 예배를 인도하고 오셔서 주님께 영광을 올렸다. 그러저러 해서 다녀오신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누워 잠들려고 할 때 카톡방에 올라온 아버지의 감사 글을 읽고 새삼 놀라웠다. 우리가 더욱 주의 이름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 저렇듯 일이 되어지는 과정을 보고 전해 들으면서 그 부모의 사무친 마음을 어찌 어르고 풀어주시는가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는 이를 모른다. 기롱하는 자들이다. 너무 더딘 것 같으나,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우리의 한계가 얼마나 초라한지. 초등학문으로 대학논문을 운운하려는 꼴과 같다. 그래서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4).” 2천 년 전부터 주의 재림을 논하지만 그게 언제냐고 하는 소린지.

 

우리에게는 2천 년이나 하늘의 시간은 이제 이틀 지난 것이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9).” 하긴 하루가 천 년 같던 이들의 17년 세월이 한숨에 그 원통함을 그나마 풀었을 날에, 아버지는 그 감회의 장소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주의 영광을 맛보았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아이의 아무런 변화가 없는, 오히려 호전되기는커녕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아서. 나의 고질적인 우울감은 종종 두려울 정도로 나를 짓누르고 있지만. 때론 너무 막연하고 한심스러운 세월인 것 같아서 종잡을 수 없다가도. 문득 아내가 오려놓은 낡은 졸업앨범 속에서의 나의 옛 모습이 엄연한 것처럼. 3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의 나와 눈이 마주치는 저들 사진 속 반가운 얼굴들의 낯섦 같이. 그러나 분명한.

 

본 그대로 오시리라!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1:11).” 반드시 오신다. 육신을 입고 오신다. 그때에 우리는 장애도 없고 아이의 뒤엉킨 뇌의 구조도 회복된다. 늙음도 병듦도 없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회복될 것이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9-10).”

 

아이와 붓글씨로 꾹꾹 눌러 적었던 말씀이 새로 나를 붙들어 세우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75: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