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전봉석 2019. 3. 18. 07:08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기다리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어떻게 명령하시는지 내가 들으리라

민수기 9:8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시편 11:3

 

 

 

 

무엇을, 어떤 일에서든지 주께 묻고 그 답을 따르는 것이 복되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기다리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어떻게 명령하시는지 내가 들으리라(9:8).” 섣불리 판단하고 행동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그 기다림은 또 언제까지인지.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영에 머물고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행진하였으니(22).”

 

그럴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신앙이겠다. 이는 그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11:3).” 말씀이 없는 삶이란 두려울 따름이다. 그대로 터가 무너지면 믿는다는 것과 믿지 않는다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인가! “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행진하고 또 모세를 통하여 이르신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9:23).” 이는 광야의 지혜였다.

 

예수님도 그 말씀에 따라 오셨고, 사셨고, 죽으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18:15).” 그러므로 우리를 세우신 더 큰 일에 대하여,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3:22-24).”

 

말씀을 증거하고 설명하고 함께 나눈다는 게 귀하였다. 우리 안에 이는 모든 감정이 뒤틀리게 된 것이 죄 때문인 것을 말해주다 내가 그러함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 문득 든 생각이 복음은 전우주적으로 가장 막중한 일이라는 데 동의한다. 결국 모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우리 영혼의 뒤틀린 감정도 그렇지 못할 때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근심하지 말라는 것. 하나님을 믿으니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 이를 말해주다 울컥하였다.

 

내가 가장 필요한 말씀을 나로 하여금 증거하게 하신다. 아이 둘이 앞에 앉아 말씀을 들었다. 함께 점심을 먹고 올라와 성경공부를 하는데 에베소서 2장을 같이 읽었다. 이런, 이게 모두 내 이야기 아닌가!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1).” 이를 느끼고 고백할 수 있겠나?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3).”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 아니라고 말할 때 우리는 말씀과 상관없는 사이가 된다.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면 하나님과 불편한 것도 모른다. 다 죽은 줄 알았는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4-5).” 이것이 우리 수고로 이룬 게 아니라는 데 고개를 숙였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 한참을 설명하고 듣고 위하여 기도하였다. 같이 내려가 당구도 치고, 아이들이 돌아간 뒤 마음이 좋았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일을 하는 것이다. 때론 휘몰아치듯 감정이 앞서 나를 고꾸라뜨리기 일쑤지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그러니 너무 애쓰지 마라. 수고하지 마라. 그 짐을 지고 힘겨워하지 마라.

 

말해주다 내가 울컥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 본래대로 주께 유용하기를 바랐다. 분노는 주의 선하심을 바라는 데 옳은 일을 향해 가는 새 힘이 되고, 우리 안의 비통함은 오히려 우리 영혼이 마비되지 않도록 주를 바라게 하며, 슬픔은 지난 날을 청소하는 정화 역할을 하고, 두려움은 미연에 분별력을 더하고, 죄책감은 어긋난 태도를 바로 잡아 양심을 다시 뛰게 하며, 그 끔찍한 수치심은 우리가 주의 도우심을 바랄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즐거움은 주를 바라는 의지가 되어준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 야곱은 이를 현실에서 찾았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28:17).” 이와 같이 내가 평소에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이의 글을 묵상하고 성경을 상고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으로 허덕이든 간에 그 모든 게 유용하였다. 귀하고 또 값진 선물이었다. 구원이다.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구원이었다. 아이들은 이런 설명에 어찌 귀를 기울였을까?

 

까딱하다간 승리가 승리할 수 있다. 우리의 뒤틀려진 자화상을 보라고 하였다. 나도 저를 부러워하였다.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어린나이에 그처럼 승승장구하며 한 번 사는 거 폼 나게 사는저의 이야기가 멋져보였다. 오늘 이 이야기는 아마도 여러 설교자들의 입에 회자되어 말씀을 증거하는 데 있어 그 터의 중요성을 일깨웠을 것이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제 아무리가 자신이 의롭다 한들 우린 결코 악하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2:10).”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았다고 하니, 우리의 선은 무엇인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남을 구제하고 제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희생일까? 구도자의 삶으로 선을 찾아가는 인생일까? 아니다. 우린 이미 선을 찾은 사람들이다. 선을 선물로 받았다.

 

새삼 무얼 더 열심을 다해 죽어라 하고 애쓰는 선은 그 어떤 악보다 악할 수 있다. 스스로의 자부심은 성전에 동전을 던져두고 나무에 목을 매는 일과 같다. 누구보다 열심이었던 유다와 더욱 성스럽기를 바란 사울을 생각하였다. 저들을 망하게 한 것이 그 터를 허문 게 자기 의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모범도 또는 배울만한 삶의 업적이나 자랑이 없다고 고백하였다. 그렇듯 내가 줄 은과 금은 없으나, 반드시 줄 것이 있었으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3:6).”

 

나의 하루하루에 읽은 책과 생각한 생각과 근심한 근심이 모두 유용하였다. 먼저는 나를 더욱 말씀 앞에 세운다. 말씀 앞에 서는 내게 고작 두 명의 아이와 가족 두 명이 전부이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여서 나는 들려주었고 들려주었던 말씀이 나로 먼저 주 앞에 엎드러지게 하였다. 온유함이란 이처럼 주 없이 살 수 없다는 마음이겠다. 잠시라도 엄마가 눈에 띄지 않으면 불안하여 울어버리는 아이가 금세 엄마 품에서 평온을 찾고 곤히 잠드는 것처럼.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131:1).” 주여 결코 나는 내가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에 힘쓰지 않겠습니다.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게 하소서. 그러할 때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2).” 우리는 이를 바랄지어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

 

말씀 하나면 한 영혼이든 숱한 영혼이든 문제될 게 없다. 마음이 온유할 수 있음으로 딛고 걸어가는 이 땅을 모두 유업으로 얻을 것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5).” 그럴 수 있는 심령은 가난하였다. 무엇으로도 주를 대신할 수 없었다. , 두렵도다 이 땅이여.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요 그의 성소이다. 고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3).”

 

이를 갈망하고 갈구할수록 나의 뒤섞이고 뒤엉킨 감정들이 앞서 수치심을 더하고 공연한 분노와 좌절과 낙심과 슬픔을 안기곤 하였으니, 나는 나로 할 수 없음을 애통해한다. 저 아이의 어쩔 수 없음을 보면서도 애통해 한다. 우리에겐 위로가 필요하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그래서 더욱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그래서 영적인 허기는 우리로 온유함을 얻게 하는 것이었다.

 

아이가 아이의 말에 응대해주는 모습에서 긍휼을 보았다. 평소 자신도 말이 없던 아이가 형형거리며 따르는 아이의 말도 안 되는 말에 대꾸를 해주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7).” 이쯤 되면 한 날의 삶에서 주의 팔복을 맛보는 게 아닌가? 더욱 갈구함으로 마음이 청결하여진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 우리는 서로에게서 하나님을 본다. 일련의 사회 사태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본다.

 

어수선한 세상에서도 우리는 평안하다. 단순해진다. 아프면 기도하고 기쁘면 찬송한다. 어려울 거 없다. 복잡하고 번잡스러울 게 아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그것으로 누가 멸시하고 안 믿는 부모가 뭐라 한다 해도,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 이를 마땅히 여기는 데서 천국이었다.


이처럼 말씀 앞에 앉아 말씀으로 그 길을 찾게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2).” 앞서간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물론 예수께서도 박해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또 한 날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그러니 우리는 날마다 이 터 안에 있어, 두렵도다 이곳이여!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로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28:17).”

 

그러므로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11:3).”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