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여 도우소서

전봉석 2019. 3. 19. 07:08

 

 

호밥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

민수기 10:30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

시편 12:1

 

 

 

우리는 나팔을 불어야 한다.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10:2).” 주 앞에 나올 때를 알려, “또 너희의 희락의 날과 너희가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는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며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시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10).”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신다. 이에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12:6).”

 

그리하여 모세가 장인의 아들 호밥에게 같이 동행하기를 권하였다. “모세가 모세의 장인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 호밥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주마 하신 곳으로 우리가 행진하나니 우리와 동행하자 그리하면 선대하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을 내리리라 하셨느니라(10:29).” 하지만 호밥이 그에게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30).” 그러니 우리의 심정은 같다.

 

주님 도와주세요.’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12:1).” 우리가 무엇을 안타까워하고 주께 아뢰어 고할 것이 무엇인가를 오늘 말씀은 일깨우시는 것 같다. 결국 우리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으로 그 원인은 무지였다. ‘알지 못하였으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3:17).”

 

아이가 물었다. 말씀 붙들고 하려고 하지만 잘 안 돼요! 나도 말했다. 그러게! 우린 또 마음이 흐려지고 흐트러져 실천은 온 데 간 데 없이 아쉬움만 남기 일쑤여서, 우리에게 남은 생애 동안 어찌 몰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그때 우리에게 나팔을 불어 알린다. 어떤 어려움이 또는 고질적인 감정의 걸림돌이 우리로 경각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공연한 어려움은 없다. 힘에 부치는 것이다. 그럴 때면 나팔이 불어 외치는 것 같다. ‘우리의 부르심을 보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그러니 너는 어떻게 하는지 물으면,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할 수 있는 대로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물론 이것이 또 나를 옭아매 얽매이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있으려 하고 하던 일을 하려 한다. 누가 알든 모르든, 보든 안 보든, 그 가운데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것을 꼭 지켜 행하려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처럼 아침에 일어나 묵상을 하고 묵상을 글로 쓰는 일. 이제는 몸이 알아서 알람보다 정확하게 그 시간이면 그 일을 행하는 것뿐이다. 때론 왜 이 일을 하고 있어야 하나, 이런들 뭐가 달라지겠나, 하는 온갖 회의와 갈등이 닥칠 때면, 나를 부르신 부르심을 다시 되새기는 것이다. 결코 나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주 앞에 엎드리는 게 답이었다.

 

그런데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2:8).” 알지 못하므로 같이 갈 수 없어 오늘 날 내 곁에 호밥이 얼마나 많은지. ‘호밥이 이르되 나는 가지 아니하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 저 나름은 일리가 있으니 막연하고 맹목적인 것 같은 우리의 앞날보다 익숙하고 잘할 수 있는 자신의 현실이 더 나은 것이다. 그러했다면 아브라함도 결코 우르를 떠날 수 없었을 것이니!만일 알았더라면.’ 이를 꺼려하지 않을 텐데.

 

결국은 부르심의 차이였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1:23-24).” 누군 듣고 미련하게 여기고 우리는 듣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혜로 삼는다. 그럴 수 있는 게 귀하였다.

 

저들은 그래서 외쳤다.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오죽하니 빌라도가 당황하여 되물었다.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그러자 저들은 더욱 자신의 앎으로 대치하였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9:15).”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오늘 우리의 무지는 모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그것이다.


저들의 무관심이나 악의에 찬 조롱과 빈정거림이나 그 속에 사특한 생각을 어찌할 것인가. 그럼에도 주의 긍휼하심은 놀랍기만 하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12:20).” 그러니 선생님은 어떻게 해요? 하고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내게 물었을 때 다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자랑할 게 없다는 것.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9).” 나는 이제 복음을 알면 알수록 나를 알게 되고 나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밖에 도움이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곧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26-27).” 우리로 주밖에 우리를 도우실 이 없음을 마주하게 하는 것이 복음이다. 나의 무지와 그 완고함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러할 때 나는 세상 풍조를 따랐고 저들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위로를 삼았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2:2).” 나는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3).” 한데 여전히, 내가 뭘 그렇게까지 나쁜가? 하는 마음이 든다면, 지금도 그 미련함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것이다.

 

엉뚱한 오해가 우리를 순식간에 사로잡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17).” 나는 아침에 한 아이에게는 내가 묵상했던 말씀 구절을 카톡으로 적어 보내어 잠시라도 말씀 앞에 앉게 한다. 그래도 다른 아이는 기특하게도 오전에 자신의 블러그에 묵상을 적어 올리는데 이를 읽고 저의 이름을 계속 주 앞에 되뇌어 기도하게 된다. ‘안 믿는 가정과 주변 모든 친구들이 다 믿지 않는’ 저의 척박한 영혼의 최전방에서 부디 주만 바라고 말씀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를.

 

주가 함께 하시길. 주의 도우심만이 우리로 이 길을 가게 하시는 것임을. 단 한 사람도 스스로 자기 의지와 수고로 주 앞에 설 수 없음을. 오늘 다윗의 기도는 그러므로 절절하였다.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12:1).” 어쩌면 우리 안의 호밥은 날로 이성적이다. 저의 판단이 옳다. 이 무모한 대열에 합류하는 것은 마치 난파선에 올라타는 것과 같다. 예전에 선생은 내게 그리 말하였다. 가시적으로 건축 빚에 허덕이는 교회로 인해 모든 걸 쏟아 붓듯이 함께 동행하고 있을 때였다.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저의 판단은 하나도 틀린 말이 없었다.

 

그러나 알지 못함이라. 오히려 복음의 무모함 앞에 자신들이 자존심을 상하는 것이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1:22).” 참 기묘한 것은 저의 진심어린 충고와 권면에도 나는 기어이 난파선에서 내릴 수 없었고, 그렇게 무모한 항해를 떠난 것이다. 물론 내릴 것도 안 내릴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로 오히려 내린 것보다 못한 항해로 이어져 나의 영혼은 오랜 세월을 시달려야 했지만.

 

오늘에 이르러 기어이 부르심에 따라가는 데도 선생은 앙금이 남아 서로는 전에처럼 편하지가 않다. 그렇듯 형식적으로 안부를 묻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내는 게 어디 또 선생뿐인가. 함께 알지 못하여 악의에 찬 빈정거림으로 세상 풍조대로 살았던 친구들은 여전히 거기에 있어서 오늘의 나와는 동떨어진 것이라. 나는 자주 외롭고 또 그때를 그리워하기도 하면서 여전히 좌충우돌 한심하기 그지없는 인생이지만.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단호하시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3:7).” 다른 길은 없다. 인자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곧 주께서 우리에게 오심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10:45).”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고후 3:14-15).” 여전히 자신들의 눈을 가려 보지 않으려 하는 나의 옛 동무들을 위해 지금은 다만 무던히 주께 아뢸 뿐이다. 멋대로 굴면서도 스스로 자유로운 사고를 하고 사는 것처럼 사회 각층에서 유력 인사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4:17).” 성경은 내게 일갈한다. 흔들릴 때, 또는 막연하여서 좀처럼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때,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18).” 저들의 무덤덤한 현실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 한때 믿었고 지금도 믿는다고 하면서 누구보다 그쪽 계열의 목사나 신부나 어느 선각자들과 교류하는 것을 마치 더 훌륭한 일인 것처럼 여기는.

 

이를 자부하며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저들에게 나는 다만 나팔을 불 따름이다. 오직 나는 그같이 그리스도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20).” 저들은 하나님을 우주의 기운으로, 삼라만상 가운데 운행하는 모든 신으로, ()이고 도덕이며 이상이라 여기는 그런 대상이 나의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나팔을 불어 일깨워야 한다. 우리 안에 숱한 호밥들을 향하여 바로 알려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3:3-4).” 저들의 알지 못하는, 자신들의 지식과 사회적인 권위와 그 일궈낸 보람과 업적의 수건으로 스스로 눈을 가린 채 살아가는 저들에게,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사옵고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17:25).”

 

그러므로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12:1).” 그들이 이웃에게 각기 거짓을 말함이여 아첨하는 입술과 두 마음으로 말하는도다(2).”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에 가련한 자들의 눌림과 궁핍한 자들의 탄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제 일어나 그를 그가 원하는 안전한 지대에 두리라 하시도다(5).”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6).” 단련한 은으로 나팔을 만들어 불며, “여호와여 그들을 지키사 이 세대로부터 영원까지 보존하시리이다(7).” 저들을 생각할 때면 기도한다.

 

왜냐하면 비열함이 인생 중에 높임을 받는 때에 악인들이 곳곳에서 날뛰는도다(8).” 그러니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들이 인생 중에 없어지나이다(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