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신명기 7:21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편 45:6
아침 일찍 아이가 왔다. 일기를 쓰고 성경을 같이 읽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에게 ‘유종의 미’라는 말의 의미를 들려주었다. 한 번 시작한 일을 끝까지 잘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마무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우습게도 나는 폐업을 하는 가게에서 보고 배운다. 11층 복합건물의 9층에 글방이 자리 잡고 있다 보니 하루가 멀다 하고 가게는 새로 들어오고 나간다. 뚝딱, 인테리어가 그럴듯하게 멋스럽다. 그런데 그 끝은 모든 게 비슷하여 엉망이다.
같은 업종이 서로 경쟁하여 치고 들어오다 보니 더 예쁘고 화려하고 멋지게 꾸며지는 게 처음 시작이라면 그 끝은 다들 볼품이 없다. 문짝 하나에도 수십만 원을 들였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뜯어져 그 위에 폐자재가 쌓여 버려지는 게 어마어마하다. 이러저러하여 모두의 사연과 우여곡절을 다 알 수는 없으나, 아이에게 이 달 말까지 가기로 한 공장 일을 끝까지 처음처럼 잘 마무리하라는 말을 그리 에둘러 설명하였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서 운운할 게 못 된다. 늘 우리에게는 시작이라, 그 시작이 마지막인 것처럼 마음가짐을 그리 두고 사는 게 현명할 거였다. 다 다음 달에 어디 주체로 수기공모를 하는 게 있다. 마침 주제가 ‘가족사랑’이라 나는 아이에게 슬쩍 글쓰기를 권했다. 상금도 상금이지만 목표가 생기면 그 노력도 보람이 있을 거였다. 의외로 아이의 호응은 적극적이었고 가족들에 대해 글로 쓰는 아이의 집중력이 대단하였다. 같이 여러 번 뜯어고쳐야 할 문장이나 표현에 대해서는 우선 신경 쓰지 말고 글을 쓰게 하였다.
우리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시간이 들어가고 그 걸어온 길에 서로의 존재가 새삼스러운 법이다. 아이에게 주기도문을 외우게 하려고 여러 번 같이 읽고 그것을 필사하게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제 일 년이 되었다. 그 결실로 아이는 학습을 받았고 오늘은 세례를 받는다. 누가 뭐래도 이를 저처럼 사모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다들 그러려니 하는 정도였다면 아이는 기다리고 설레고 준비하였다. 같이 요한복음을 읽었고 잠언을 다루다 시편을 읽었다. 주기도를 같이 한다는 것은 엄청난 힘이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오늘 우리가 하는 이 모든 행사와 생각과 실천은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일이다. 모세는 물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출 3:13).” 저는 앞서 주의 이름을 듣고 무서워하였다.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6).”
우리 안에 주를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진귀한 것이다. 결국 그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55:8).” 이 다름을 다름으로 인식하여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첫 걸음이다. 나는 아이의 어눌함이나 모자란 사고능력을 주의 귀한 선물로 안다. 나에게 두신 연약한 육신과 그 불편을 이제는 하나님의 값진 은혜로 여기는 것과 같다. 이는 좋고 싫고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계시록은 강조하였다(4-5장). 곧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하나님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이 놀라운 역사는 결코 개인적인 또는 독자적인 일이 아니다. 우리가 미처 알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사건이고 역사인 것이다. 가령, 나는 아이엄마가 아이 세례식에 오기를 바라지만 오라고 하지는 않았다. 아이에게도 그리 언급하여 조건처럼 여겨지지 않기를 바랐다. 소위 교회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 행위에 있어 부담스러워하는 부분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일 뿐이다.
우리가 같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부를 때의 전우주적인 역사에 대해, 다 저녁에 아이가 카톡을 했다. 엄마가 같이 온다는 소리는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데 있어 그러려니 하고 있었지만, 형도 같이 간대요! 하며 좋아하는 아이의 글자들이 그 격앙된 목소리로 들리는 것 같았다. 아이엄마도 안 올 줄 알았는데 아이의 형까지 온다고 하니, 나는 이 놀라움에서 그 이상의 어떤 힘과 신비를 느낀다. 마치 우리가 주의 이름을 같이 부를 때 벌어지는 엄청난 변화를 직접 목격하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이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데 소용된다.
이는 비로소 하나님의 영토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시인은 노래하였다. “할렐루야 그의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의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시 150:1).” 우리의 일이면서 사명이 여기 있었다. 나는 일찍 잠자리에 누웠다가 아이의 그런 카톡 내용을 보고 나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회개하였다. 안 왔으면 할 거라는 나의 판단을 하나님은 보란 듯이 뒤집으신 것은 물론 아이의 형까지 온다고 하니! 내가 듣고 내가 판단하고 있던 나의 생각은 얼마나 허술하기 짝이 없는지!
“그의 능하신 행동을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을 따라 찬양할지어다(2).”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내가 하는 게 없다. 할 수도 없다. 툴툴거리면서도 나는 다만 준행할 뿐이다. 매사에 보다 경건하고 보다 의연하며 보다 평안하였으면 좋겠는데, 나의 안달복달 지지고 볶는 마음으로 내가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일 뿐이고. 하나님이 그의 능하신 행동으로 일하시었다. 앞으로의 이야기를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3).”
앞서 나는 아버지에게 딸애 이야기와 아이 이야기를 아셔도 모르는 척 하시라 부탁을 하였다. 마치 내 생각이 깊고 배려가 좋은 듯하나 나는 그저 얄팍한 사람이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소고 치며 춤 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4).”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찬양이다. “큰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5).” 시편의 유종의 미는, 아니 성경 전체의 유종의 미는 찬양이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6).”
오늘 말씀은 이를 다시금 일깨우신다. 우리 곁에 두시는 이런저런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 타협하지 말고 기죽을 거 없다는 것. 나는 미약하나 나와 함께 하시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엄청나시다는 것.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심이니라(신 7:21).” 앞으로의 일은 언제나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특히 나는 그 불안을 병명으로 지니고 약을 먹고 진정시키며 살아야 할 정도이다. 어쩌겠나? 그 정도인 내게 주님은 주의 이름을 주시었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시 45:6).” 흔히 우리는 저 아이보다 낫다고 여겨 측은히 여기고 연민하여 안쓰러워하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더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사실을 말씀은 일깨우신다. 하나님은 앞서서 두려움에 젖어 있는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하나님은 결코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다. 우리의 실천과 행동으로 주의 선한 뜻을 이뤄 가실 뿐이다. 비록 나의 부질없고 모자라기 그지없는 행동인데도 그 마음을 어디에 쓰시려는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아내와 딸에가 같이 나와서 점심을 먹었는데 하필 딱 주말 점심시간이었고 백화점 3층에 있는 국숫집이었다. 아이도 나도 와글거리는 사람들로 불안해하였고 그런 우리들 모습을 아내와 딸애는 이해하지 못했다. 서로 그렇다 해도, 각자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라 해도.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신 7:26).” 내 안에 들이는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관심을 두신다. 그것이 우리의 올무가 될 것을 우려하신다. 같이 망할까 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넘겨주신 모든 민족을 네 눈이 긍휼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지 말라 그것이 네게 올무가 되리라(16).”
부활주일 아침,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것과 같이 진멸 당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멀리하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26).” 왜 그토록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묵상한다. 그리고 입을 열어 찬송하고 글을 씀으로 나의 일상에 드러나는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기록한다.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시 45:1).”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6).”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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