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12 주일
사도행전 5:1-11
아나니아와 삽비라
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5:3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5: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5:7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5:8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5:9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5:10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들어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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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사적인 자리가 없다. 모든 게 공유되고 나눠지고 덜어진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만찬의 세계’다. 요즘처럼 개인적인, 사적인, 프라이버시 등을 주장하는 사회에서 교회는 엄연히 ‘이상한’ 세계다. 서로는 직고하며 기도를 부탁한다. 믿을만한 사람에게가 아니다. 존경하는 사람에게도 아니다. 교회에 한다. 하나님께 한다.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롬 14:12).” 이를 확대하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 5:14).” 서로의 아픔을 알리고 합심하여 주의 이름으로 관심을 두고 치유하며 그를 위하여 주께 고한다.
곧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물론 이는 수도원이나 폐쇄적인 공동체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 이상이다. 우리는 서로가 지체이다. 각 마디마디마다 연결된 구성원으로 한 몸을 이룬다.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막 10:8).” 그러므로 “①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②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③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④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⑤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⑥ 하나님을 찬미하며 ⑦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4-47).”
① 우리 믿는 사람들은 같이 한다. ② 자신의 것을 나누고 통용하는 데 있어, 소유에 대한 개개인의 주장이 없다.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③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 살기 바쁜 것은 세상의 구조다. 서로 돌아볼 시간이 없다는 것은 이미 교회 밖의 영역에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④ 우리는 성전에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⑤ 각자 집에서도 가정예배가 드려진다. 이는 기쁨과 순진한 마음으로 교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⑥ 하나님을 찬미하는 삶이다. 곧 ⑦ 믿음의 가정은 복되고 화목하여 안 믿는 주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을 책무가 따른다(4:32, 34-3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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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이를 역설적으로 들려주기 위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저들도 교회의 일원으로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교회 공동체에 내기로 하였다. 그런데 자발적인 마음이기보다 사람들을 의식하였던 모양이다. 다들 그러니까 자신들만 가만있기가 그래서 그랬을까? 남편 아나니아는 땅을 팔아 그 값의 얼마를 감추었다. 그의 아내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다. 베드로가 이에 말하였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그랬을 때 아나니아가 양심에 찔려 얼른 고백을 하고 회개하였으면 어땠을까? 저는 끝까지 모를 줄 알았다. 다시 베드로가 물었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는 그러는 동안에도 ‘설마’ 했다. 누가 알겠나? 싶은 것이 죄다. 죄란 그렇듯 숨기려 드는 속성이 있다. 아나니아는 끝내 죽었다. 곁에 있던 이들이 보고 크게 두려워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체를 메고 나가 장사하였다. 세 시간쯤 지나서 그의 아내 삽비라가 들어왔다. 아직 그녀는 그 직전의 일을 알지 못했다. 베드로가 물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그러자 그녀는 시치미 떼고 말했다. “예, 이것뿐이라.” 죄란 그런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설마’하다가 이내 확신이 되고 신념이 되어, 이윽고 자기의지가 된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베드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삽비라도 죽었다.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삽비라도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였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였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냐?
일주일 내내 뉴스는 우리에게 우리가 이길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보도한다. 모든 사건 사고는 끔직하고 잔인하고 파렴치하며 허망하다. 오늘은 마침 석가탄신일이다. 보은군에서는 지난 금요일부터 오늘까지 <속리산 신(神) 축제>를 연다고 하였다. ‘신과 함께 EDM’, ‘신 시네마 천국’ 등 다채로운 볼거리로 ‘산신제’, ‘굿판’을 벌인다고 한다. 이를 자연문화유산으로 전통을 잇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도저히 사탄을 이길 수 없다. 우리의 죄를 이길 수 없고, 죽음을 이길 수 없으며, 그것으로 율법을 이길 수 없다. 나는 오늘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의 <담대한 기독교>(복 있는 사람)에서 읽은 우리가 이길 수 없는 네 가지 원수를 풀어, 이를 중심으로 오늘 본문으로 이어가려 한다.
1. 죄
우리는 누구도 죄를 이길 수 없다. <머릿속의 악마>라는 어느 소설 제목처럼 우리 안에는 수시로 죄가 든다. 이 죄는 실제 자신만 모른다. 스스로 자만하는 것이다. 자신이 자신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긴다. 통계나 여론조사를 수치로 교육이나 심리 치료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자녀 교육’이라는 명목 아래 아동학대의 대부분이 가정에서 비롯된다. 부모가 어찌 그럴 수 있나 싶지만, 의붓아비가 딸애를 성추행하였고 아이는 친부를 찾아갔으나 저는 생모에 대한 미움으로 아이를 구타하고 돌려보냈다. 자신의 추행을 남에게 알렸다고 하여 의붓아비는 아이를 살해하여 저수지에 버렸고 아이의 생모는 이 일에 가담하였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우리는 이처럼 우리 안의 죄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지혜는 소리쳐 우리를 부른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잠 1:20-22).” 그렇듯 날마다 뉴스가 아우성친다.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전 1:15).”
어찌하여 죄가 네 마음에 가득하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 11:39).” 우리는 다들 점잖을 떨고 교양을 갖춰 교육을 받은 지성인은 다른 것처럼 행세한다. ‘김학의 사건’이 우리에게 소리친다. ‘버닝썬 사건’이 우리를 불러 세운다. 어찌하여 죄가 네 마음에 가득하냐? 그런데도 우린 한사코 자신은 저들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도 다를 게 없지만 그래도 저런 부류보다는 낫다고 여긴다.
다윗도 그랬다. 자신의 죄를 알지 못했다. 우리야의 아내를 범하고 임신시킨 뒤 이를 은폐하려고 우리아를 전장으로 몰아 죽였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그의 처를 왕궁으로 데려와 왕비로 삼았다(삼하 11:27). 결국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셨다. 그리고 이를 우회적으로 깨닫게 하고,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일갈하게 하셨다(12:7-8). 우리 모두의 양심은 죄로 마비되었다. 남의 잘못은 똑똑히 보면서 자신의 잘못은 못 본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5).”
2. 사탄
우리는 누구도 사탄을 이길 수 없다. 오늘 말씀도 이를 묻는다. ‘어찌하여 사탄이 네 안에 가득하냐?’ 저는 우리를 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린다. 담배를 안 펴본 사람은 담배의 유혹이 적다. 음란한 생활을 안 해본 사람은 음란한 생각이 적다. 술을 안 마신 사람은 술에 대한 유혹이 적다. 그래서 사탄은 속삭인다. 맥주 한 잔은 어때서? 사회 생활하려면 이 정도 접대문화는 다반사야?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 땐 담배 한 대가 큰 위로가 되지! 마치 대수롭지 않은 듯 아주 소심하게 권한다. 그러나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처음엔 다들 소소하였다. 대수롭지 않게 누구를 놀렸고 외면했고 무시했으며 무관심했다. 다들 그러고 사니까, 다른 여러 무리가 큰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되기도 하였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재미삼아 타로 점을 보고 흥미로운 볼거리를 찾아 산신제를 기웃거리고 굿판을 문화로 받아들인다. 사탄은 그 정도면 어떠냐고 속삭인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그러나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3. 죽음
또한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현대 의학은 죽음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 얼마나 엄청난 돈과 시간을 허비하는지 모른다. 생명 연장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면서도 정작 살아 있는 동안 건강한 삶을 위해, 누락된 복지를 위해, 낙후된 보건시설을 위해 투자하는 예산을 감축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죽음을 연장하려는 무리한 지출을 반대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을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맞이하고 다룰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는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만족할 수 없다. 99세를 살았어도 호상이란 없는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이치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에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그때가 되면 모든 만물은 드러날 것이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우리의 어떤 노력도 죽음을 모면할 수 없다. 연장하여 몇 년을 더 살 수는 있다 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게 아니다. 성경은 일관되게 가르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왜냐하면 우린 누구나 죽음을 맞이할 것이고 죽음 너머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스스로 의인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롬 3:19).” 결국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4. 율법
율법으로 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율법이 원하는 완전한 답이다. 그런데 인생은 누구도 스스로 완전할 수 없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 분명히 어느 훗날 우리는 모두 주 앞에 설 것이다. 그때 너는 이 땅에서 얼마나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왔니? 얼마나 의롭게 살다 왔니? 남을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살았니? 하고 묻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아무리 의롭고 완전하다 해도 율법을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곧 누가 자력으로 주의 성산에 설 것인가!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 15:1).”
다만 우리가 얼마나 마음을 다해, 성품을 다해 주를 사랑했는가를 보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는 아무리 의로워도 다 더럽기 때문이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곧 율법으로는 단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이 사랑은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다. 저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율법의 완전한 답이 되셨다.
나오는 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는 누구도 ‘죄와 사탄과 죽음과 율법’을 상대로 승리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그러므로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이기셨다. 곧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셨다. 그래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죽음을 폐하셨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우리는 언제든 죽는 것도 낫다. 그러나 오늘도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그 유익을 위해 살기 때문이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 결국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받았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9).”
예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셨다. 사탄을 물리치셨다. 율법의 완성이 되셨다. 그러므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오늘 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는 매우 극단적인 예로 우리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날마다 저들이 우리 이름을 부르며 외치는 것 같다. “어찌하여 너의 속에 아직도 죄가 가득하냐? 사탄이 가득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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