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사도행전 4:23-31 /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전봉석 2019. 4. 25. 13:20

20190428 주일

 

사도행전 4:23-31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4: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4: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4: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4: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4: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4: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4: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들어가는 말

*

사도들이 잡혔다. 성전 미문의 마흔 살 된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한 사건이 발단이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저를 일어나 걷게 하였다. 이 기적은 이슈가 되었고,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었다. 제사장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당시 산헤드린 공회라는 최고의 권력기구에 모였다. 예수가 부활하셨다고 가르치는 것을 못하게 금지하였다. 사도들을 가두고 심문하였다. 장로들과 서기관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도 산헤드린 공회에 함께 모였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저들이 물었다. 자신들의 신념과 통치이념에 배치되는 일이었다. 베드로가 답했다.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꺼려지는 이름이었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이름이었다. 유대인들은 저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한 이가 예수였고, 이방인들에게는 나사렛 같은 천한 데서 나타난 한낱 젊은 몽상가요 선동가에 지나지 않는 인물이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사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과감하게 전하였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 그러자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학문 없는 범인임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그들이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것과 지금은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더는 비난할 말이 없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저들에게 사도들은 골칫거리였다.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소식이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차라리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자. 그리고 이 후에 아무에게도 그 이름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자.” 저들은 결의한 후에 사도들에게 말했다.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그런 그들을 더는 잡아둘 명분이 없자 풀어주었다.

 

*

오늘 본문은, 그렇게 놓여난 사도들이 동료들에게 가서 이 모든 사실을 알리고 함께 모여 기도하는 내용이다. 저들이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기도하였다.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하는 저들의 기도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기도는 우리의 힘이다. 곧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우리는 그 기도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 우리의 삶이란 기도의 삶이다. 기도는 전우주적인 역사를 이룬다.


허사를 경영하는 세상에서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는 일은 당연하다. 이에 사도들과 같이 우리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무장은 기도뿐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권능과 그의 뜻대로 예정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곧 오늘 저들의 기도 가운데서도 드려진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우리들이) 이 성에 모였나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저들의 기도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오늘 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곧 우리 성도의 기도는 전우주적인 역사를 이룬다. 단지 무엇 하나를 두고 오늘을 모면하려는 기도가 아니다. 숱한 우여곡절과 사연과 사연을 굽이돌아 오늘에 이른 우리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를 이룬다. 이에 그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기도와 말씀은 불가분의 관계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기도 없이 말씀은 없고, 말씀 없이 기도는 없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본문을 염두에 두고,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에 주목해보려고 한다.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소서.’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기에 앞서 우리의 구제와 기도를 동일시하며 주의할 것을 당부하셨다(6:1-8).

 

첫째,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둘째, 외식하는 자와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셋째, 은밀하게 하라.

넷째,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하라.

다섯째, 중언부언하지 말라.

여섯째, 이미 다 아시는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 기도하라.

 

주님은 여기서 기도와 구제를 나란히 놓으셨다. 곧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 소원을 비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남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9-1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는 예수님의 아버지, 성부 하나님을 같이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사이의 우리다. 곧 교회다. 성도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다. ‘나의 아버지가 아니다. ‘우리의 아버지. 저는 내가 감히 부를 수조차 없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신 분이다. 풀과 나무와 새와 바람을 다스리시는 이시다. 우리가 나고 죽는 생을 다하는 동안 직접 관여하시는 분이시다. 저는 창조자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런 우리가 우리안에 들 수 있는 조건은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던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는 특권 때문이다.

 

이에 믿음의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12:1).” 결코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나만의 인생이 아니다. 외로운 길을 가고 있는 게 아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4:6).”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5).”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엄청난 값을 치른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로 가족이 되었다. 이생의 생물학적인 가족을 넘어 종말론적인 가족을 이루었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하늘에 계신하나님께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담대함은 엄연한 자격이다. ‘우리 아버지하늘에 계신아버지다. 모든 데 스며있는 범신론적인 존재로의 신이 아니다. 추상이나 개념도 아니다. 실제 우리 아버지는 거처가 있으시고, 얼굴과 모양과 목소리가 있으신 실재의 하늘에 계신아버지다. 이에 시인은 노래하였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8:3-4).”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루는 모세는 물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3:13).”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셨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6).” 곧 우리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의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은 무엇에 의한 존재가 아니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14).” 하나님의 본명은 야훼시고, 그 이름은 여호와시다. 직명으로는 하나님이시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바라는 것은 곧 우리의 거룩이 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 저는 온전하시다. 우리는 온전하지 못하다. 우리가 온전할 수 있는 길은 온전하신 이 앞에서, 내 발에 신을 벗는 일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5).”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으로 우리가 전복당하는 일이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55:8).” 나의 생각과 주장과 주권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어디까지? 바울이 고백하였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곧 우리가 온전하여지는 길은 하나님의 온전하심 앞에서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하는 일이다. 우리가 거룩하여지는 길은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일이다. 내가 저 아이를 사랑하고, 이 부당한 처우와 허사의 땅에서도 양보하고 손해보고 희생하는 것은,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하는 일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우리의 관심은 그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우리 곁에 저 고약하고 밥맛없고 재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저들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위해 아들을 죄로 삼으신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21).”

 

저는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어 마땅한 행동까지도 선으로 바꾸셨다. 모든 죄는 고통을 야기한다. 우리는 광야를 지난다. 죄로 인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8: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46:10).”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은 한결같이 한목소리로 주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여기서 우리를 위한 간구는,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7:25).” 곧 우리의 기도는 어느 순간부터 나의 기도가 아닌 우리의 기도로 주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간구한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나의 나라가 침노 당한다는 소리다. 이는 전투적인 의미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9:5).” 곧 우리가 차지할 땅은 나의 공로 때문이 아니다. 나의 정직함으로도 아니다. 본래 악하기 때문이다. 이를 하나님이 쫓아내신다. 그 이름을 걸고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신다는 것은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1:15).” 매우 종말론적인 의미다. 이미 때가 찼다.’ 아직은 아니지만 이미 이루어진 나라다. 이미 완성된 나라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나라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에게 그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래서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은 간단하다. 회개한다. 그리고 복음을 믿는다. 다른 여지는 없다. 우리에게 다른 이름을 주신 바 없다! 여럿 중에 하나가 아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를 분명히 증언하였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4:12).” 바울은 다시금 강조하였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1:10).”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증거로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11:19).” 우리의 변화되는 모습이 믿음의 증거다. 때론 미미하고 희박해보이지만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5:15).”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복음은 우리 안에서 역사를 이루고 계신다. 각각의 우여곡절과 사연과 사연 사이에서 구구한 일상이 우리에게 거듭 소리치는 것이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여태껏 아무렇지 않게 잘 먹고 잘 살던 우리의 일상이 졸지에 전쟁터로 바뀌는 일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같지 않다. 이를 요셉의 이야기에서 살펴보자. 형들이 저를 죽이려하다 노예로 팔았다. 이는 악을 범한 것이다. 후에 요셉의 증언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것의 실체를 들려준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5).” 이것이 하늘의 뜻이 이 악한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증거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20).” 종교 개혁자 마친 루터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휜 활을 가지고도 정확히 과녁을 맞히신다.’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우리는 요셉에게서 기다림을 보았다. 소망을 보았고 인내를 보았다. 언제까지? 하고 되묻게 될 때,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 3:8).” 돌아보면 모든 시간이 잠깐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인내에 참여하라는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이를 선으로 바꾸시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8:28).” 그리하여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 하늘은 저 천국, 죽음 너머, 하늘 어디에 있는 모호한 곳이 아니다. 오늘 여기, 성도들의 교제가 있는, 이 자리, 이 시간이 하늘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그러므로 그의 나라에서 우리는 오늘을 살며, ‘일용할양식을 구한다. 일용할 것으로, 우린 족한 줄을 안다. 이는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 일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12:3).” 일용할의 범주를 넘어서는 모든 것이 문제의 화근이다. 우리는 너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또한 주기도에서 주목할 것은 나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을 구한다는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기도와 구제는 같은 의미다. ‘우리는 같은 아버지를 부르는 성도다. 그런데 자신의 수입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을 꺼려서 십일조를 분산하여 드리고, 만일 교회에서 한 달에 얼마나 법니까?’ 하고 물으면 그런 사적인 것을 왜 묻느냐며 불쾌해 한다. 하지만 인격적인 관계란 결코 사적인 관계가 아니다. 교회에서 개인적으로 일용할 양식은 없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이는 매우 민감한 문제다. 일찍이 바른 신앙생활을 자부하였던 청년이, 모든 율법을 지키며 산다고 했는데 자기 것을 나눠주고 좇으라고 하실 때 저는 기겁을 하고 돌아갔다(19). 돈 앞에 장사 없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23).”

 

헌금 이야기가 나오면 다들 떨떠름하다. 우리의 일용할 밥벌이는 그만큼 치열하고 치졸하다. 있으면 있어서 치열하고 없으면 없어서 치졸하다. 그게 돈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때, ‘일용할양식을 구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또한 자기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을 구한다는 데 주의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모든 양식은 허사다. 집도 차도 옷도 음식도, 원하는 모든 것도 헛되다. 우리는 얼마나 속절없이 자기의 뜻이 하늘의 뜻이길 바라는지 모른다. 우리가 바라는 양식은 일용할정도가 아니라 풍족할정도의 것이다. ‘우리의 것이 아니라 의 것을 구한다. 이런 기도는 안 믿는 자들도 두루 한다. 주기도가 아니다. 족한 줄 모르고 다오 다오 하는 거머리의 두 딸과 같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30:15).” 족한 줄 모르는 무리에 우리 자신도 속해 있지 않은지? 그리스도인으로 우리의 양식은 일용할정도이면 족하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게 용서다. 정말 이와 같은 기도라면, 나야말로 영원히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고약하여 수시로 미움과 증오의 마음이 들끓는다. 우리는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용서는 용서를 받은 자의 것이다. 이 얼마나 무겁고 무서운 기도인가! 내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도 용서받지 못한 게 된다. 이에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용서의 첫 걸음이 된다. 누가 누굴 탓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용서받지 못했을 때 남도 용서할 수 없는 법이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2:13-15).” 이처럼 우리 자신을 위한 용서는 엄청난 값으로 지불되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치르셨던 그 한량없는 사랑 앞에 우리는 다만 속수무책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3-24).”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는 일은 우리로 그 죄에서 사함을 받는 일이다. 하나님의 본성은 용서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103:8).”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또 얼마나 참고 기다리시는지, 베드로는 이를 노아의 때로 설명하였다.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벧전 3:20).” 그러므로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37:7).” 곧 용서는 선물이다. 우리에게 두신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의 보혈의 십자가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일은 괜한 일에 자꾸 시비가 붙는 것과 같다. 우리의 일상은 안전한 포구가 아니라 항해 중인 대해(大海)와 같다.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땐 아무렇지 않던 물살이, 갈등이 매순간 우리에게 넘실거린다. 그저 관례였고, 앞서 선임들도 그러했던 부정 아닌 부정이고 불법 아닌 불법에 대해, 더는 우리 양심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이 험난한 바다에서 우리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으로 족한 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8:23-25).” 같은 풍랑에서도 누구는 편히 주무시고 누구는 하루가 멀다 하고 난리다.

 

우리가 시험에 든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나의 나라가 전투를 벌이는 일이다. 시험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일깨운다. 불의 앞에서도 멀쩡하고 아무렇지 않다면 그게 오히려 심각한 일이다. 그러므로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6:18).” 우리가 우리를 위해 서로 기도해줘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허다한 시험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에 우리의 기도는,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7).”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구원은 통치의 영역이다. 다툼은 당연하다. 그와 같은 주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다는 것은, 나의 나라와 나의 권세와 나의 영광을 더 이상은 주장하지 않겠다는 소리다. 양도하였다는 의미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 7:37-38).” 우리가 기도 중에 누구의 이름을 부르며 아뢸 때, 우리의 기도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 그리하여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11:29).” 그래서 더는 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산다. 더는 밥벌이의 지겨움으로 자기 앞가림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산다.

 

이것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는 나라다. 모든 영광을 주께 돌리는 것, 우리의 주장과 주권을 돌려드리는 일,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5-8).” 우리가 누구를 용서한 것은 우리가 용서를 받은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모두 버리고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으로도 갚을 길이 없다. 하나님이신데 사람이 되셨다. 이보다 더 큰 용서가 있을까? 죄도 없는 사람인데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다. 이보다 더 큰 용서가 있을까? 그렇게 본체는 하나님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셨다. 이 모든 게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7:39).”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같이 누리게 하시려고,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8:54).” 그러므로 우리의 영광은 우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릴 때의 영광이다. 우리의 거룩은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때의 거룩이다. 우리의 기쁨은 하나님이 우리로 기뻐하실 때의 기쁨이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2:16).” 지금은 우리가 희미하여 잘 알 수 없다 해도,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15:8).” 곧 우리의 열매는 성령의 열매로 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나오는 말

 

아멘

아멘은 우리 말로 옳소이다’, ‘그렇게 될지어다’, ‘이는 참되다하는 의미다. 우리는 함께 외쳐 주기도를 한다. 주기도는 혼자 사사로이 하는 기도가 아니다. 함께 나누어 소리 내어 하는 기도다. 이로써 우리는 서로 아멘으로 화답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결코 다른 이름은 주신 바 없다. 여럿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주기도는 우리의 기도다. 우리 중 누군 기도를 잘 못한다. 아니, 별로 안 한다. 아예 안 한다. 잘 할 줄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멘하고 서로 화답함으로서 내 기도는 너의 기도가 되고 너의 기도는 나의 기도가 되어 우리의 기도는 주기도가 된다. 그러므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4:2-3).”

 

이 시간에도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한다. 내가 허투루 세상에 물들어 살고 있을 때도 우리의 기도는 아멘으로 서로 화답한다. 성령의 기도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8:26).” 어눌해도 괜찮다. 두렵고 떨려도 괜찮다.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해도 괜찮다. 물론 이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중언부언과는 다르다. 기도를 잘할 줄 몰라 어눌하여, 그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어도 우리는 서로 아멘으로 화답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께 계시도록, 우리에게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2:20).”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 높여,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