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사도행전 4:19, 5:29 / 우리의 마땅함에 대하여

전봉석 2019. 5. 31. 10:37

   


20190602 주일

 

사도행전 4:19, 5:29

우리의 마땅함에 대하여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4:1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5:29).”

 

 

들어가는 말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모든 분노와 시기와 우울감은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의 결과다. 평안이란 그리하여 자신이 어쩔 수 없는 데서 마음을 거두는 일이다. 저절로 생겨나는 마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와 같이 자신을 웃어넘길 줄 아는 사람들이다. 한 작가는 양손에 진리 추구진리를 각각 쥐어주고 어느 쪽을 붙들 것인가 물었다. 안 믿는 저는 진리 추구를 갈구하는 쪽을 택했다. 보람을 얻고 의미를 부여하여 나름의 성과를 결실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달관(達觀)이 아니다. 깨달아 사소한 일에 집착하지 않고 멀리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게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럴 수 없음을 자인하고 주 앞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다. 이를 총칭하여 그리스도인이라 한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특별한 말씀을 남기셨다. 이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라는 것이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10:38).” 그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하신 말씀과 배치되는 게 아닐까? 유추해보면 자기 십자가이 아니다. 말씀을 자세히 보면 이 말씀은 모두에게 적용하신 게 아니다. 첫째, 예수를 따르는 자의 기본자세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사도 마태의 다른 언급을 들어보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여기서 두 번째 단서를 얻을 수 있다. 곧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을 부인한다는 의미다. 자기 부인은 구약의 성도에게도 동일하셨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3:5).”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도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5:15).” 이를 사도들은 예수님께 직접 들은 것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7:33).”

 

셋째, 자기 십자가는 따르는 자의 정체성을 바로 일깨우신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8:34).”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14:27).” 곧 우리가 예수의 제자로 예수의 가신 길을 따라가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에 성경은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우리의 마땅함에 대하여 다음의 명제들을 다루고자 한다. 곧 우리의 마땅함에 대하여, 첫째,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과 둘째, 과연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과 셋째,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에 대하여, 이를 그리스도인의 조건이나 정도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이치로 보아 옳은 것임은 분명하다. 이를 우리가 마음에 들어 좋아하는 것이 고로 마땅한 것이다.

 

첫째, 하나님 앞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4:19).”

 

그러하여 그러할 수 없는 우리의 나약함으로 주께 고하는 일, 가령 한 아이가 의무와 권리의 차이에 대하여 물었다. 의무는 마땅히 행해야 하는 것이고 권리는 마땅히 누려야 하는 것이다. 그 차이는 엄연하여서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다운 의무와 권리를 어찌 알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먼저 주께 구할 수 있다. 담대히 주 앞에 나올 수 있다. 우리 이야기를 마음껏 하나님 앞에 토로할 수 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다. 그런 우리는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의 나라와 의와 먼저 구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 이는 우리의 의무다. 곧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산다는 일은 이와 같이 의무와 권리가 동시에 작동하는 삶이다.

 

안 믿는 자들에게는 그런 우리의 모습이 미련할 따름이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24:5).” 저들은 우리를 전염병으로 취급한다. ‘종교는 아편이라는 논리를 편 마르크스의 주장은 그와 같다. 저들 눈에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우리의 삶을 속박으로 여긴다. 세상에 너무 좋은 게 많은데 그걸 죄악시하고 자신을 정죄한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보면 오히려 그 올무에 걸린 것은 저들이다. 술 없이는 친구와 대화도 못한다. 향락과 접대가 없으면 거래를 성사시킬 수 없다. 담보나 보증이 없으면 신용을 얻을 수 없다. 저들이 만든 세상이 오히려 저들을 구속하고, ‘아편쟁이처럼 죄의 중독자로 살아가게 한다. 모든 범죄의 80%는 술 때문에 벌어진다는 통계도 있다. 사랑을 성적인 쾌락으로 취급하는 사회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벧전 3:13).” 우리의 선행은 결코 의도적인 게 아니다. 의를 위하여 한다. 우리는 저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업, 낙오, 실패, 도태와 같은 것을 근심하는 게 아니다. 오직 우리 안에 소망에 대해 묻는 자에게 대답해줄 말을 준비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14-16).”

 

그래서 고난 중에도 즐거워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그러므로 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의다. 누가 물었다. 저는 유능하여 어느 벤처 기업에서 스카우트하였다. 주일을 보장하고 신앙을 존중하는 게 저의 조건이었다. 그런데 규모가 성장하면서 대표는 이를 뒤로 하고 회사를 먼저 생각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조건으로 10년 뒤 인센티브를 적용 20억을 제시하였다. 10년 뒤면 저의 나이 50대가 된다. , 저의 양손에 진리 추구진리가 주어졌다. 과연 우리는 어쩔 것인가?

 

둘째, 무엇이 옳은가 판단하라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4:19).”

 

누구나 진리에 대해, 빌라도와 같이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생각만 있었을 뿐 저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정치적인 야망을 위해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저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내어주었다. 명분을 내세우고 더 나은 쪽을 선택하듯이 기독교를 선택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2:23-24).” 오히려 믿는다는 사람들이 더욱 완고하여져서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예수를 못 박게 내어주었다. 정치인으로, 연예인으로, 대기업 정규직원으로 살면서 저들은 종종 공과 사를 구분하는 의미에서 여전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는 자들이다. 타종교 행위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작품을 앞두고 고사를 지내는 돼지머리 앞에 고개를 조아리는, 직장 일로 사적인 종교활동은 뒤로 하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일갈한다.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왜 우리는 세상에 굴복하는가? 다들 그러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안 그러고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말씀은 명확히 경고하신다.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10:26).” 하다못해 권불십년(權不十年)이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다. 권력은 십년이면 기울고, 아름다운 꽃도 십일이면 진다. ‘몸짱에 열광하고 줄 댄 권세를 쥐고 사느라 여념이 없는 세상에서 과연 무엇이 옳은가 판단하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셋째,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5:29).”

 

우리의 지혜는 두려워할 줄 아는 것과 두려워하지 않을 줄 아는 것을 구별하는 일이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2:10).” 아무리 세상이 어떠하다 해도 겁낼 거 없다. 당장에 불이익이 따르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영생을 운운하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인 것만 같다. 그래서 양다리를 걸치듯 한 손엔 진리 추구를 한 손엔 진리를 쥐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많은가? 성경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앞서도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4:19).” 우리는 매순간 판단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를 붙드는 힘은 순종이다. 오늘 말씀은 이를 하나의 짝으로 다룬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5:29).” 판단을 백날하면 뭐하나? 생각만 많으면 뭐하나? 그에 따른 순종은 성도의 마땅함을 이루는 척도이다. 그러므로 우린 세상에 권세 잡은 자들에게도 복종한다! 이는 저를 세우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3:1-2).”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가 할 순종을 판단해야 한다.

 

 

나오는 말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5:29).”

 

우리는 저들을 반격하기보다 모든 선한 일로 증명한다. 비방하지 않는다. 다투지 않는다. 관용한다. 범사에 온유함으로 한다. 온유함이란 어린아이 같이 엄마 품에서 누리는, 엄마로 족한 아이의 평안함과 같은 것이다.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을 때에야 가장 행복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순종으로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5:32).”

 

너희에 대하여는 우리가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고 또 행할 줄을 우리가 주 안에서 확신하노니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4-5).” 우리가 알 수 있는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은 우선 예전의 내가 아니다. 전에 좋아하던 세상이 아니다. 취향대로 좋아하던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서서히 우리의 열매로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7:17-19).”

 

그리하여 우리 삶은 언제부턴가 성령의 열매를 바란다. 맺어간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5:22-23).”그러므로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1:21).” 우리는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사모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무모하다면 바로 그 무모함으로 주의 길을 따른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13:17).”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