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전봉석 2019. 5. 24. 07:01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여호수아 6:25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시편 78:72

 

 

우리의 습성이 그렇다.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78:40-41).” 그럼에도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72).” 가만 보면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면 대책이 없다. 긍휼하심이 아니면 감당이 안 된다. 주의 은총만이 살 길이다. 우리 마음이란 우리가 이길 수 없는 네 가지, 죄와 사탄과 죽음과 율법과 함께 나란히 놓여도 손색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3:28).” 말씀 앞에 승복하고 인정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 그 참상은 기가 막힌다. 그러니 그 우리 사람의 마음을 어찌할까?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감사할 줄 모른다. “감사하지도 아니하고그저 그 마음이 허망하여 미련하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21).”

 

아이 셋 중에 하나만 왔다. 안 온 아이 둘은 하나는 오겠다고 하고 하나는 안 오겠다고 한 경우인데 결국 안 오겠다는 아이가 오겠다는 아이를 붙들었다. 그리 될 것을 알았다. 그러니 그럼 온 아이는 또 어떤가? 무기력과 짜증에 쌓여 말을 걸기도 어렵다. 하다못해 앞으로 무얼 하고 싶니? 하고 물었더니 신경질적으로 모른다며 대꾸도 하기 싫어하였다. 난감한 노릇이다. 그냥 가라고 돌려보내기도 그렇고, 나야말로 쩔쩔매듯 마음만 어려웠다. 이는 모든 게 마음의 문제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22).” 그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우상과 바꾸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23).”

 

그저 게임하고 놀고, 먹고, 자고 싶단다. 만사가 귀찮은 것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뭐라 하면 듣기도 하고 같이 속엣 얘길 나누기도 하였는데 요즘은 그것마저 귀찮아한다. 말 그대로 먹을 거나 주고 내버려두고 놀게 하면 그걸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나야말로 아이들을 감당할 능력이 안 된다. 마음을 쓰면 오히려 다 망치는 것만 같다. 공연히 어렵고 의기소침해졌다. 늘 내 이야기는 어디가 아프거나 힘들었거나 어려웠다는 소리밖에는 할 게 없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럴 때도 신기하지만 아이로 인해 나는 위로를 얻는다. 아예 안 오는 아이들이야 내가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오기 싫은데도 억지로라도 온 아이를 돌보는 일은 새로운 은사와 같아서 주의 손길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저들이 그러저러한 것은 다 계통이 있었다. 그처럼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마음에는 그 정욕에 따라 더러움에 내버려두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24).” 몸을 서로 욕되게 한다. 성적인 문제도 문제지만 자기 몸을 썩어질 대로 방치하고 귀찮아하며 무기력하게 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오후께 잠깐 누구와 통화하면서 지금 내 곁에서 가장 주 앞에서 성실한 사람을 하나 꼽으라고 하면 아침마다 올라와 같이 글 쓰고, 책 읽고, 시편을 묵상하고, 직업훈련을 가는 아이. 저는 아침에 먹은 음식도 까먹었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하고 싶었는지도 금세 잊어버리고는 하지만 그래서 더 손길이 가게 되는 영혼이라. 나로 하여금 저를 돌봄으로 주의 일을 하는 보람을 얻게 한다.

 

이상하게 이 아이와 있을 때 자꾸 웃는다. 심지어 호탕하게 웃다 숨이 넘어갈 정도까지 말이다. 마치 아기를 보고 혼잣말을 하며 까꿍, 하고 모두 함께 웃는 그런 순수한 웃음이다. 처음에는 아이가 딱하고 그 어미의 신세가 처량하여 안쓰러워하던 마음인데, 주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보내주신 아이다. 헨리 나우웬의 <아담>을 다시 읽은 것도 그 때문이다. 저는 정신지체장애를 가지고 평생 사람들의 돌봄으로 살아간 아담에게서 예수의 사명을 빗대어 우리에게 보내신 특별한 선물로 서술하였다.

 

내가 보면 요즘 아이들은 너무 풍족해서 그렇다. 너무 멀쩡한 육신이라 그렇다. 도대체 모자란 게 없다. 돈도 넉넉하게 들고 다니면서 피씨방이니 노래방이니 거칠 게 없고, 잘 먹고 건강하여 어디 특별히 아픈 데도 없다. 아쉬울 게 없으니 누가 뭐라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지가 않는다. 이는 잘 사는 아이든 못 사는 아이든 그 부모의 역할이 실종됐기 때문이다. 훈계가 사라지고 교훈은 흔적을 감추었다. 아이보다 아이 같은 아이엄마는 저들 옷차림부터가 민망하기 짝이 없다. 자기들 원하는 대로 산다. 그러면서 자식들을 뭐라 훈계하려니 아이들 귀에 그저 가소로울 수밖에!

 

그 영혼의 순결함이 훼손되었다. 부끄러움을 모른다. 아니 그것을 정체성이라 운운하며 자존감을 들먹거린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26).” 날이 더워지면서 아이들도 엄마들도 그 옷차림부터가 가히 꼴불견이다. 나는 종종 한눈 팔 듯 저들의 민망한 외모에서 누가 어른이고 누가 아이인지 구분할 길이 없다. 합당치 못하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8).” 서로 합당치 못한 것을 괜찮다며 편을 든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32).”

 

로마서 118-32절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우리의 마음이 오늘 날 이 아이들의 마음으로 전염되었다는 데 놀랐다. 그런 가운데도 라합은 우리 중에 있었으니,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6:25).” 이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이 은총이요 은혜이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13:16).” 예수를 나의 구주로 삼고 사는 이 시대의 은혜가 너무 헐값에 허비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17).”

 

차마 아이에게 말은 못했지만 나는 얘가 아팠으면 좋겠다. 망했으면 좋겠다. 살려주세요, 하고 애원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면 좋겠다. ‘라합처럼 절박함을 느껴야 한다. 간담이 녹아내려야 할 일이다. 다음부터 오지마라, 하는 소리가 목까지 올라오는 걸 꾹 누르고 참았다. 아이를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니 녹초가 되었다. 여기저기 갑자기 아우성치듯 몸이 아팠다. 나야말로 주를 바라고 의지할 따름이다. 나는 아이들을 통해 계속되는 실패를 배운다. 이상하게 마음을 좀 더 쓴 아이부터 나를 멀리한다. 아예 등지고 길에서 마주치면 쌀쌀맞게 못 본 체 하고 지나가기도 한다. 나는 억장이 무너지고 너무 슬프다. 내가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아이와의 관계를 망쳐버리는 것 같다. 얘도 그럴까 싶어 뭐라 말도 못하고 나 혼자 앓는다.

 

그러면서 아이의 하루 일과에 나의 피로도 풀린다. 퇴근했나? 밥은 먹었나? 운동은 가나? 아이와 카톡을 하고 통화를 하면서 장난을 치고 낄낄거린다. 온전하다고 여기는 아이들과는 너무 어렵고 이처럼 아픈 아이와는 깔깔거리며 즐겁다. 우리의 절박함은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6:56).”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댈 수만 있으면, 하고 간구한다. 그렇다고 내가 저 아이를 망하라고 빌 수 없고 아프고 병들라고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늘 날 우리의 온전함이 우리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이다.

 

오직 주만이!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참으로 귀한 은혜였으니,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78: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