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
여호수아 7:26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편 79:9
아간이 참 한심한 것 같다가도 저와 다를 바 없는 나의 그릇된 자세가 마음에 밟힌다. 유난히 나의 뒷모습이 불쌍해 보였다며, 등굣길에 중2 아이가 보고 오후께 수업하면서 그리 말하더란다. 며칠 위층 언니가 끌고 나가서 산보를 하였다며, 어제는 데리러오지 않아 그냥 집에 있었다고 아이엄마는 말했다. 교회는 다니시느냐, 물었더니 자신은 절에 다닌다며 딱 선을 그었다. 도수치료를 받는데 저는 내게 어떤 자세로 운동을 해야 한다고 채근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하였다. 뭐라 할 말이 없는 대목이라서 서로는 잠자코 있었다. 이래저래 할 말이 없는 하루였다. 그런데 그런 나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온통 아간과 다를 게 없지 않았나?
주어진 한 날의 시간 동안 얼마나 자주 주의 것을 훔치고는 하는지! 왜 아이엄마에게 복음의 중요성을 말해주지 못했을까? 나의 침묵은 묵인으로 여겨졌을 것이고 수긍으로 이어지지 않았겠나? 왜 아이가 글방에 오기 싫어하는 것을 그러려니 하고 모르는 체 하고 마는 것일까?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따라하고 운동을 배웠어야지, 왜 나는 지레 안 된다고 거부하였을까? 궁극적으로 내게 두시는 주의 뜻을 내 임의로 취하고 도둑질하여 감추어두는 아간과 다를 게 없는 태도이지 않았던가!
마치 내 앞에 돌무더기 아골 골짜기가 놓인듯하다. “그 위에 돌 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 오늘까지 있더라 여호와께서 그의 맹렬한 진노를 그치시니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아골 골짜기라 부르더라(수 7:26).” 저의 처신과 그에 따른 주의 맹렬하신 진노가 나를 경고하시는 것 같다. 그저 우울증과 불안장애로 집에만 있는 아이엄마에게 말동무가 되고 건성으로 할 말을 숨겨두라는 게 아니었다. 이혼 가정의 중2 아이 마음에 가득한 불안과 불평을 알면서도 오기 싫어한다는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나의 태도가 아간의 무책임함 같지 않던가. 어떠하든 내게 맡기신 몸으로 여태껏 살아왔는데 그걸 건사하고 유지하는데 소극적인 것은 맡기신 이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그 의미는 퇴색되는 게 아니겠나.
경계석 같이 아골 골짜기에서 울려오는 소리 같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내 안의 악이 내버려지지 않으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을 수 없다. 온유함이란 내 생각이 앞서는 것을 내려놓는 일이다. 절에 다닌다는 아이엄마에게 무슨 말인들 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싶은, 글방에 오기 싫어한다는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한들 말을 듣겠나 싶은, 이 몸으로 그런 근력 운동을 해봐야 뭐하겠나 싶은. 이러한 나의 지레짐작들이 아간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을 한다. 스스로 이 정도는 어떤가 싶었을 저의 안이함과 막연함과 자기 판단과 그 가치기준이 말이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 야고보 사도의 엄연한 진술이 나를 돌아보게 한다. 늘 말씀은 준비하고, 뭐라도 하는 것처럼 나름의 전투에 참여하였지만 정작 말씀을 준행하는 데는 번번이 아간의 마음을 따랐던 것이다. 그렇듯 나의 지레짐작에 대해 성경은 더욱 엄중히 일깨우고 계셨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 내가 뭐라고 저 아이엄마에게 전화를 하여 안부를 묻고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저의 사연에 귀 기울인단 말인가. 정작 내 말만 하고 저의 말만 듣다 주의 말씀은 한 번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면서! 또한 아이를 위해 얼마나 애통해하며 위하여 기도하였던가? 그저 내 몸이니 내가 잘 안다는 식으로!
한 날에 있었던 일이 오늘 아침 말씀 앞에서 혼쭐이 난다.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수 7:13).” 내가 임의로 취하였던 마음이지 않을까? 아이에 대한, 또는 아이엄마에 대한, 심지어 내 몸에 대한 나의 판단과 결탁은 ‘온전히 바친’ 게 아니었다. 어디쯤에서 나는 스스로 할 만큼 했다고 여기는 것으로, 모두 저들 탓이었다. 안 오겠다는 아이 탓이고 절에 다닌다고 말을 끊는 이의 탓이고, 본래 불편한 몸이었다는 장애 탓이고. 이처럼 굳어진 마음이었고 지레짐작이었으며 안이함이었다.
오늘 말씀은 또한 기도를 일깨운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시 79:9).”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소서.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활동을 위해서도 나를 도우소서.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해서도 나를 건지소서. 나의 아간 같은 마음을 제하여주소서. 고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나는 아이에게 카톡이라도 남겨야겠다. 어렵사리 서로 마음을 열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 되겠다. 그럼에도 아이엄마에게 주를 소개하고 교회를 알리며 하나님이 어찌 나와 함께 하셨는가를 말해주어야겠다. 어떤 운동도 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은 팔다리를 이끌고 주 앞에서 주어진 날 동안은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겠다.
온유함이란 엄마의 품에 안기는 아이 같은 마음이다. 어떠하든 엄마만 있으면 된다는 심정으로 그 안에서 위로가 되는 것이다. 곧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이는 주어진 날 동안에 내가 걷는 모든 지경을 넓히는 일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신 19:8).” 내 몸의 장애나, 무슨 말을 한들 소용없을 것 같은 아이엄마나 그의 신앙이나, 한참 예민하고 고약한 중2 아이의 서러운 마음이나, 저들을 내게 주실 때 나는 그 땅을 딛고 사명을 다하는 것이어야 했다. 곧 온유함이란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이런저런 난감하고 어려운 총체적인 난제 같은 하루하루를 묵묵히 걸어가는 힘은 오직 하나였다.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그 말씀을 지키어 생각하는 일,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2:19).” 그것이 사소하나마 하나의 행함이 되고 그 뜨악함으로 해봐야 무슨 소용이겠나 싶으면서도 다시 또 딛고 걸어가는, ‘네 지경을 넓히시리라.’ 하는 말씀의 실현이 되는 것이다. 어디가 자꾸 아프고, 누구에게 어떤 일을 해봐야 소용도 없을 것 같은 의기소침함으로 입을 삐쭉 내밀고 뚱한 마음이었으나, 이처럼 말씀 앞으로 이끄시고 새로 위로 하신다. 아프니까 아들 목소리가 듣고 싶었는데, 이 녀석이 며칠째 식중독으로 고생하며 먹은 걸 싸고 토하고 고생을 하였던가보다. 마음이 어려운데 생각은 뚜렷하여졌다. 다들 저마다의 땅을 딛고 산다.
서로에게 너는 어디냐고 묻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나는 내게 펼쳐놓으시는 땅을 딛고 걸어가는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온유함으로 그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 내게 두신 아이들과 아이엄마와 내 불편한 몸이 그것이라면 그것으로 다만 온유하여서 “온유함으로 말씀을 받으라(약 1:21).” 다른 말 할 거 없다. 괜한 생각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아들은 아들에게 맡기시는 땅을 딛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저마다 ‘하나님과 나’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다. 그러할 때 수시로 드는 ‘아간의 마음’에 대하여는 오늘 말씀처럼 엄히 경고하시는 바이다.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수 7:13).” 아골 골짜기를 지나는 때에 더욱 선명하게 들려지는 말씀이었다.
고로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8-9).” 번번이 마주하는 아골 골짜기의 R=돌무더기 앞에서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이방 나라들이 주의 기업의 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시 79:1).” 고로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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