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여호수아 5:15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
시편 77:11
발의 신을 벗는 행위가 겸손이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을 주 앞에서 벗어내는 일이다. 불타는 가시떨기 나무 앞에서 모세도 그러했듯이 오늘 여호수아도 모든 일에 앞서 신을 벗기신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수 5:15).” 이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말씀은 일관되게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집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만을 주목하게 하신다. 그때마다 말씀은 조명하여 나의 발에서 신을 벗기신다.
겸손은 하나님의 일의 시작으로 복종을 알린다.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롬 13:5).” 사역에 있어 예수님보다 나은 대접을 받으려하는 모든 것을 억누르게 하신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곧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마 10:25).” 혼자 있다가 아무도 없다는 것에 힘들어하다가 그래서 설교 원고를 다듬고 성경을 뒤적거리며 말씀 앞에 설 때면 그 의미가 새로운 것이다. 아이엄마는 어딜 다니는지, 전화를 피하는지, 이틀째 통화를 못하였지만 다행이었다. 아이는 여전하여서 같이 있는 시간에 나는 더욱 주를 바란다. 몸과 마음이 어려워서 주를 더욱 의지한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되새김질하면 할수록 나의 나 됨이 유용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겸손은 진리를 추구함으로 기뻐한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때론 신기할 따름이다. 이는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그러니 굳이 나를 드러내어 내 목소리를 높이는 게 아니었다. 페이스북을 탈퇴하고 계정을 삭제하였다. 소통을 운운하며 자기 목소리를 내는 창구에 대한 환멸의 소극적인 저항이었다. 1인 방송이 판을 치고 내남없이 달려든 것에 싫증도 났다. 그만큼 말품을 팔아야 하는 일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촌 처제로부터 자동차보험 문제로 연락을 받았다. 아내의 귀띔이 있긴 했으나 시작한지 얼마 안 됐다는 저는 서툴렀고 그만큼 설명도 오래 걸렸다. 그냥 다 알아서 해달라고 해도 주섬주섬 말이 이어져야 했고 그만큼 품을 팔아 밥벌이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덕분에 형부와 통화도 해보고 좋으네요, 하는데 저이의 경상도 사투리가 구수할 뿐 공연히 나는 어렵고 불편하였다. 하다못해 이처럼 인맥을 갖고 하는 데도 상당한 말의 소비가 있었고, 그러느라 얼마나 피곤할까 생각하니 눈물겨웠다.
돌아보면 무엇에 시간을 두고 마음을 기울여 정신을 팔고 살았는지, 어울려 함께 하였던 사람이나 그 성과에 대하여는 가히 눈물겨울 정도로 보잘것없는 것이다. 지난 주일에 엄마가 말했다. 평생 목회를 하는 데 있어 그 끝에 마음에 남는 성도는 하나둘뿐이라더라. 그것도 족한 것이지 하나도 없는 경우가 허다하단다. 나는 새겨듣지 않아 그때는 무슨 소린가 했는데, 죽자고 곁을 주고 품을 함께 하였던 사람들이라 해도 돌아오면 그저 그랬구나, 싶은 것이다. 그러게 어릴 적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새삼 주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내가 옳다고 여기며 추구하였던 생은 한낱 기억으로 떠돌다 그나마도 잊히는 게 전부였으니, 겸손은 모든 지식과 모든 경험이 믿음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한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 4:7).” 선생이니 친구니 애인이니 하면서 참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며 좋아라했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인덕이라 여겼고 내 생에는 늘 인복이 있다고 자부하였다. 그런들 천년만년 가는 마음은 없다. 서로가 그런 것이어서 사람은 그저 사이를 같이 할 때 곁을 주고 품을 팔던 사이로 족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말씀 외에 다른 무엇이 남을까? 다들 좋을 때나 좋은 것이고, 나는 그렇게 사람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에 대한 평가다.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판단이다. 가급적 소셜미디어 SNS 출구를 활용하지 않으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카톡이 생기고부터 직접 듣는 목소리가 줄었다. 통화를 하면서 굳이 만날 일이 줄어든 것과 같다. 시스템에 의해 서로의 생일까지 알려주고 축하문자라도 보내라는 강요를 받는 시대가 되었다.
그만 잊히고 식어져도 무난한 사이라면 여기까지 족하였다. 오히려 나는 지나간 사이에서 눈을 돌리자 지금 내 곁에 두시는 한 사람에게 집중하게 된다. 아이의 영혼을 두고 주께 아뢸 시간이 생겼다. 중2 아이가 같은 또래 누가 적극적으로 글방을 선호하니 마음을 긋고 자신은 안 간다고 했단다. 어쩌다 하필 그 애만 이번 무슨 글쓰기에서 상을 타지 못한 것도 계기가 되었겠다. 아무래도 그렇겠다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나는 그 애가 자꾸 마음에 밟히는데 어찌해야 하나 주목하게 되는 것이다. 종종 말하길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너를 생각한다.’ 나는 이를 감추지 않는데 그것은 나 역시 신기하기 때문이다. 내가 왜 저 애 때문에 신경을 쓸까?
겸손이란 이와 같은 실수를 인정하고 이해하며 어떤 비판도 겸허히 수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모든 게 막연할 따름이어서 단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러므로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잠 12:15).” 한데 오늘 날 모든 미디어는 이를 역행한다. 자기의 주장을 옳다고 내세우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이는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5:11).”
그러므로 내 발의 신을 벗는 겸손은 나의 모든 일과 성과와 업적이 하나님께 있음을 시인하고 인정하고 굴복하는 것이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3-16).” 나의 자랑을 모두 내려놓고 주 앞에 승복하는 것!
마침 겸손의 자세를 되새기며 내 발에서 신을 벗는다는 행위의 엄연함을 묵상하였다. 이는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시 77:11).” 오늘에 이르러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어찌 인도하시고 내 삶 가운데 행하셨는가, 그 기이한 일들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또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이리이다(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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