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가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하였더라
여호수아 4:14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편 76:10
‘결국 결말을 결정짓는 이는 신이시다.’ 햄릿이 말했다. 우리가 준비하지만 결국은 주의 것이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이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일로써 우리로 알게 하신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자손들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수 4:22).” 늘 망설이고 주춤거리기 일쑤지만 그럼에도 주의 이름으로 내딛을 때 주의 놀라운 일은 거침이 없다. 종종 나는 가만있는데 일이 되는 것을 본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가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하였더라(14).” 주가 붙드시고 주가 높이시는 일이다. 육에 속하면 이를 알 수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그러니까 둘 중 하나다. 성령이 충만하던가, 그 속에 사탄이 가득하던가! 설교 글을 쓰기 위해 본문을 정리하고 여러 곳을 뒤적거리면서 새로웠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 이것이거나,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5:3).” 이것이거나! 차라리 땅을 팔지 않았어도, 이를 교회에 바치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는데, 저의 마음에 성령이거나 사탄이거나 둘 중 하나가 있었다. 늘 보면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우리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서 난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오후께 주인이 건너왔다. 모처럼 여러 말을 입이 마를 정도로 이어갔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변명하듯, 그래서 답답하여 지난주에는 타로 점을 보았다고 했다. 계속 어려울 거라 했단다. 뭐라 내가 치고 들어갈 말이 아니었다. 저의 긴 한숨에서 나는 문득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말씀을 들려주고 설명하였다. 나름 믿는 자였다. 어릴 때 교회에서 열심을 다하기도 하였다. 늘 말하다보면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처럼 그 얘기를 한다. 그리고는 뒤이어 불교도 좋다고 자기 마음을 희석한다.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은 것이다. 연단이 무엇이냐고 물어 우리의 인격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굳이 안 해도 될 말 속에 자신에 대한 옹호가 대부분이다. 무의식적으로도 찔리는 것이다. 하나님을 뵙기 두려운 것이다. 나는 듣기만 했다. 곧 자신의 사무실도 세를 주고 어디 일층으로 옮긴다고 하였다. 그런저런 말이 우리더러 오래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리였다. 나야말로 그 문제는 내가 뭐라 말할 게 아니어서 웃기만 했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애착은 가히 불가항력적이다. 세우고 옮기고 없애고 하는 일을 어찌 사람이 할까? 되레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주의 진리가 훼손되는 것에만 저항할 뿐이다. 남은 노여움은 금하신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또는 이데올로기적인 입장에서 싸워야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나는 저가 건너와 굳이 시시콜콜 자신의 소소한 이야기까지 드러내곤 하는 데 놀란다. 목사님 앞에만 오면 괜히 말이 많아집니다, 제가. 머쓱해서 그런 말까지 하면서도 저가 이어가는 말의 용도는 하나님 앞에 변명 같다. 자신이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다. 듣다보면 그의 안에 싸움이 있다. 성령과 사탄은 서로 차지하려 그 한 영혼을 두고 전쟁 중이다. 그래서 나의 할 일은, 주를 본받는 자가 되는 것.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
여러 어려움이 인내를 알게 하고 인내는 우리로 연단하게 하여 주를 알게 하는 인격이 되게 한다. 그 증거가 소망이다. 더는 다른 데 소망을 두는 것이다. 저는 이 말을 알아듣기나 했을까? 자기변호에 급급한 삶이란 고단하다. 우리 마음을 혼미케 한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 나는 이 말씀을 들려주고 싶었으나 저의 끊임없는 자기변명에 말문을 닫고 있었다. 뭐라 한들 들을 리 없었고, 조금 더 가야 할 길이어서 내버려두었다. 차라리 잘 되는 것보다 잘 안 되는 게 저의 복일 텐데.
문득 든 생각이 그래서다.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일이 가장 악할 수 있다. 좋은 일을 한다고 하는 게 가장 좋은 일에 원수가 될 수 있다. 복음을 필요로 느끼지 못하는 모든 옳음과 선함과 의로움은 그 어떤 악함보다 악랄하다. 사탄은 이내 선한 빛으로 우리를 속인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두려운 일이다. 기독 신문에서 어디 보수 교단의 원로 목회자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선 것을 보았다.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 세상에서 우리는 중립을 지키는 게 아니라, 어느 쪽도 아니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보수냐 진보냐, 좌파냐 우파냐 하는 따위의 열심을 두고 사탄은 제일 부지런하게 뛴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저의 구호가 우리의 영혼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언젠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다만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의 즐거움을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 북한의 공산당이 교회를 핍박하고 믿는 자들을 처형한다고 해서 악하면, 남한의 자유주의가 교회를 인정하고 믿는 자를 내버려둔다고 해서 선한가? 선과 악의 기준을 세상에 두고 이쪽은 태극기 저쪽은 촛불을 들고 대립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부화뇌동해서는 안 될 일이다. 본래 사상은 삶을 좀 먹고 이데올로기는 정신을 좀 먹는 법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간 정치나 종교 이야기는 서로 으르렁대게 돼 있다. 나는 그런 공허한 말에 열중하는 것이 옳게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의 부패는 밖이 아니라 안이다. 내 안에 있다. 나는 왜 말씀이 절규하는지 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으로 이끌리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머리로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고, 안다고 해서 마음을 씻을 수도 없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9-20).” 본래 악한 것이지 어쩌다 악해진 게 아니다. 그런 소릴 내가 저에게 해줄 수는 없어서 저 혼자 말하고 저 혼자 결론짓고 일어서게 두었다. 하나님이 하고 계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굳이 따로 점을 보고 사주팔자를 5만원씩이나 내고 들어봤다는 소릴 왜 나에게 와서 하겠나? 나는 가만있어도 그 위엄은 주의 것이다. 아무리 교회 같지 않은 별 볼일 없는 처소라 해도 주의 거처가 되심이다. 꽤 오랜 시간을, 마치 밀린 말을 풀어놓듯 쏟아내고 돌아서는 저에게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심을 나는 보았다. 어느 것도 하나님이 하시지 않은 일이 없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사 너희를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수 4:23).” 주가 하셨고 하실 일에 있어 나는 다만 증인이다. 우리 교회는 다만 여기에 있을 따름이다. 뭐 그렇게,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다 늙은 목회자들이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길거리에 쏟아져 나온 것인지! 장로 정치인이니 전도사 정치인이니 하는 따위의 기치를 선봉에 내세우며!
성경은 묻는다.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말씀 앞에 가만히 앉는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우리 마음이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결코 세상과 천국을 겸하여 누릴 수 없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우리더러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라고 하신 적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 마음에 성령이 충만하든지, 사탄이 가득하든지, 둘 중 하나뿐이다. 일련의 모든 사태와 소요와 사람들의 소란은 “이는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24).” 곧 “주께서는 경외 받을 이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시 76:7).” 그러므로 우리의 노여움은 선한 싸움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이는 주를 찬송하는 데만 소용될 뿐이다. 남은 노여움은 하나님이 금하신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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