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
여호수아 19:51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시편 91:14
산적한 일들 앞에서 말씀을 먼저 구하기란 어렵다. 당장 건강 문제, 직장 문제, 정치, 경제, 사회의 일들, 또한 날마다 터지는 사건 사고들 앞에서 과연 나는 어찌해야 할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이는 동시에 오늘 나의 고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2).” 이는 내가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요일 2:21).” 이를 확신하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한다. 그리하면,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시 91:15).”
나는 이렇듯 말씀을 따라가는 게 좋다. 아이가 오지 않아 설교 글 초안을 작성하였다. 복지관에서 오후에 영화를 보러 가는데, 그 생각으로 들떠 여기에 오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 뭐라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듯 종종 현실과의 접촉을 상실한다. 그래서 다음을 잇지 못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나의 이해와 관심을 필요로 한다. 그럴 때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셨을 그 이해와 관심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늘 같은 짓과 같은 허물에 사로잡히는 죄의 특성을 닮았다. 야단치고 벌주어 될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직접 사람이 되시고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죄의 결과가 되셨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 결코 악인은 평안이 없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 48:22).”
아이가 오지 않아 본문을 펼치고 관련 성경을 찾아 그 의미를 이어가는 데 있어 새롭게 보이고 느껴지는 것들이 놀랍다. 이는 아침마다 누리는 영광이다. 무얼 의도하고 쓰기보다 씀으로 열어지는 세계다. 세상은 결코 세상대로 열리지 않는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우리의 믿음을 훼방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다. 자신들의 신념을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를 원하지 않은 것과 같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어찌하여 그러셨는가를, 나는 외람되게도 아이를 대하면서 나의 자세를 염려하다 깨닫고는 한다. 온유하신 주님은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7-8).”
아이의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려는 것이다. 종종 우리는 할 수 없어 주님의 마음을 구하는 것이고, 주의 사랑이 아니고는 어찌 아이들을 감당할 수가 없다. 상한 영혼은 괴팍하기 이를 데 없다. 무신경하고 무감각하고 무책임하여 정작 자신들이 무얼 잘못했는지도 모르는데, 거기다대고 뭐라 한들? 노여움만 더해 아이 영혼에 상처를 더할 뿐이다. 그래서? 아내는 한참 말을 듣지 않는 중딩 애들한테 라면을 끓여주었다. 성질 같아서는! 하고 아내는 하려던 말을 뒤로하고, 어쩌겠나? 나 역시 연락도 없이 오지 않는 아이를 걱정하다 전화를 하였을 때, 아직도 침대에 있으면서 왜요? 되묻는 아이의 어쩔 수 없음과 맞닥뜨리는 것이다. 화도 나고 어이도 없고 짜증도 나지만. 그러고 있을 때 가족 카톡방에 올라온 아버지의 성경 구절 하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 15:4).”
곧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 결국 그 한 영혼을 찾으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는 가정예배를 드릴 때마다 간구한다. 오늘도 누구 때문에 뭐가 어땠고, 어떤 아이가 또 염장을 질러 속이 뒤집어졌고, 누구 엄마의 몰염치에 치를 떨다가도 그처럼 우리의 기도는 귀결되는 것이다. 주님의 마음이 아니면 어림없다. 우리의 신념이나 헌신이나 봉사나 희생 따위로는 감당할 수 없다. 그러나 문득 드는 마음이 저 아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그게 병이라! 그러는 게 죄 때문이라! 욱하여 아이가 욕지기를 하고 성질을 부릴 때, 아내는 이를 어르고 달래며 보듬고 가는 것이다. 말인즉 고객이다 생각해야지 별 수 있어? 하고 되묻지만, 결국은 우리에게 맡기시는 한 영혼이라. 맡기신 이가 또한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더하시는 것이려니.
괜히 짜증나고 속상하다가도 잘 어르며 달래고 보니, 말씀은 이를 드러내어 보이시고 있었다(행 3:11-18). 죄란 곧 무지다. 몰라서 우리는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15).” 실제 이를 우리가 모르는 바 아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 우리도 보고 아는 그 사람이었다! 이는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사실이다(18). 곧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이다(21).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1:22).”
나는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는 일이 즐겁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날 위해 죽어주시기까지 한 그 사랑으로 나는 이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 그래서 이제 해야 할 일이 뚜렷해진 것이다. 곧 나는 이제 주의 사신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별 거 아닌 것 같은데서 감정이 상한다. 기분이 나쁘다. 화도 난다. 정리하면 아이가 오지 않았다. 나는 걱정을 한다. 조금 더, 조금 더 기다려보다 연락을 하였다. 그런데 아직 침대에 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점심 먹고 오후에 영화를 보러 가는데, 그걸 아무렇지 않게 설명한다. 그럼 연락을 좀 주었어야지? 하고 묻자, 까먹었어요! 한다.
달리 할 말이 없는 것은, 아이가 아픈 아이라. 야단친다고 될 일이 아니어서 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재미나게 잘 다녀오라고 다독이고 통화를 끊는다. 어이가 없다. 아내는 뚱한 사춘기 소녀 셋을 어쩌지 못하다 배고프고 출출해하여 라면을 끊여주었다. 욕을 한바탕 퍼부어도 시원찮을 마음인데, 어쩌겠나? 무기력과 무신경도 죄로 인한 무지 때문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행 3:17).” 우리는 언제까지 용서하고 이해해야 할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도리어 우리는 일흔 번씩 일만 번도 용서를 받고 이해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으니까! 가정예배에 앞서 우리의 한날은 고스란히 기도로 드려진다. 그리하여 또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주 앞에 예배로 마무리하는 것을 감사한다.
다음은 우리의 회개도 은사다. 성화는 그리 더디고 느리게 변화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19).” 나는 아이로 인해 깊어지는 성경의 이해를 경험한 것이다. 카톡방에 올라온 아버지의 성경 구절이 오래 되새김질 되는 것이다. 내 의지로는 안 된다.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20-21).”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 주님이 오실 그날까지,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사신으로서의 일이었다.
이내 마칠 것이다.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다.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의 족장들이 실로에 있는 회막 문 여호와 앞에서 제비 뽑아 나눈 기업이 이러하니라 이에 땅 나누는 일을 마쳤더라(수 19:51).” 그리 두루 구하시는 날들에서 우리는 우리의 쓰심이 도리어 귀한 것이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맹인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둠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행 13:11).” 이 모든 게 수순이고 은혜의 과정이었다. 결국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이를 의뢰하는 것이 복이었다.
곧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시 91:14).” 우리로 주를 사랑하게 하심이니,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4).” 두려워할 거 없다. 조급해할 일도 아니다. 묵묵히 또 무던히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16).” 그러므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1-2).” 저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시라.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11).”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0) | 2019.06.08 |
---|---|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0) | 2019.06.07 |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0) | 2019.06.05 |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도 주의 것이라 (0) | 2019.06.04 |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 (0) | 2019.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