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전봉석 2019. 6. 7. 07:03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여호수아 20:3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편 92:12-13

 

 

하루의 반경은 단순하여서 공휴일이든 주말이든 나는 그 시간에 그 일을 하며 그 자리로 맴돈다. 매일 이처럼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이유가 있고, 갈 데가 있어 그곳에서 늘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게 감사하였다.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은 것에도 더는 토를 달지 않고 임한다. 한 명이 오든 두 명이 오든 나에게 설교 원고를 준비하고 작성하는 시간이 그렇고, 저 아이 하나로 시간을 채우는 일도 그러하며, 아무도 오지 않는 날에도 그렇듯 시간에 순응하면서 단순하게 군다. 그렇게 오전이 지나 점심께 아내가 나왔다. 같이 저기 좀 멀리까지 산보를 가서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았다. 왁자한 사람들의 틈바구니를 싫어하면서도 그리 호사를 누린다. 영화를 보다 깜빡 졸기도 하면서 나의 하루 행동반경은 동일하다.

 

오전에 읽은 말씀이 은은하였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42:1).”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나를 향하신 음성으로 들렸다. 나는 주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저의 택한 사람으로 내 속에 주의 영을 주었다. 나는 온유하여 간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2).” 마음에 두시는 또한 일상의 흐름 앞에서 주의 뜻을 바란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3).” 상황이 어떠하든 쇠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주의 교훈의 말씀을 앙망한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4).” 섬들은 사람과 사람이다. 엄연히 주를 그리다 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는 49장에서도 같은 목소리를 냈다. “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1).” 저는 누구신가?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42:5).” 그 말씀을 앙망함이었으니, 아침에 주 앞에 앉는 것도, 늘 같은 시간에 같은 동선을 따라 단순하여지려는 것도,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6-7).” 그러한 나의 하루가 사명이었다.

 

늘 옹색하고 부족하기 그지없으나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8).”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도 나로 하여금 의의 길로 행하게 하실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굳은 의지 같다. 그리 여겨져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고 하루를 보내는 중에도 종종 되새김질을 하였다가 이 아침 다시 음미하는 것이다.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9).” 그런 사람이 되었다. 섬들이 교훈을 앙망함이다. 이를 바라며 주를 닮기를. 그러면 그럴수록 나의 허약하고 부끄럽고 송구한 모습만 보여져서 주의 긍휼하심만 바라는 것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을 더해주소서. 나의 기도는 또한 단순하고 단순하여 간다.

 

허무맹랑한 영화를 보고 모순된 사람들의 분주한 공휴일 오후에 섞여 천천히 걸으며 돌아오는 길은 마치 순례의 길 같았다. 나는 원하나 나는 행하지 않는 일에 대하여, 나는 원하지 않으나 나는 늘 행하는 일에 대하여,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20:3).” 내가 숨어 도우심을 구할 수 있는 오늘 아침 말씀 가운데 거한다. 내가 피할 곳, 나의 은신처 되시는.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삼하 22:3).” 흩뿌린 비로 흙냄새가 진동을 하던 길 위에서 나는 어기적거리면서도 내 발도 걷고 걸어서 돌아다닐 수 있는 나의 한 날을 사랑하였다.

 

이는 내가 보고 아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3:16).” 종종 새롭고 놀라운 일이다. 세상을 그리워하거나 지난날을 서러워하지 않는다. 누가 보고 싶거나 저와 지낸 시간을 떠올리지 않는다. 나이가 드는 일은 체념도 느는 일일까? 종종 무슨 연애 드라마를 보다 잠이 들면 아련하여 기억도 선명하지 않은 감정에 사로잡혀 깨어나기도 한다. 내 아이들이 지나와야 할 시간이기도 하여서, 성경은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에 대하여 언급함으로서 우리의 부질없음을 되뇌게 한다. 말씀이 말씀하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18).” 나로 인하여 고난 받으신 일에 대하여 묵상할 수 있는 게 귀하였다.

 

이는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21).” 단순히 어쩌다 오늘은 없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22).” 왜 사도는 모세의 말을 묵상하였던 것일까? 나의 가장 큰 사건은 내가 더는 세상에서 떠도는 섬으로 살지 않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다.’ 정현종 시인은 노래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작 떠도는 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인지 아니면 그 사람들 사이의 우리 예수이신지! 나는 걸으며 생각하다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다만 엄연한 사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18:15).”

 

때로는 아침에 읽은 말씀이 또는 나의 어떤 무료한 행동이, 생각이 문득 주를 마주하게 하는 곳이었으니.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어떠하든 도망할 곳을 마련하여두신 주의 은혜 앞에 놀라울 따름이다. “이는 너희를 위해 피의 보복자를 피할 곳이니라.” 세상은 온통 그 값을 치르느라, 날마다 오욕의 날이 거듭될 뿐이어서. 길거리에 판을 벌이고 장사하던 사람들이 흩뿌린 비를 피해 떠난 자리에서 흙냄새인지 삶의 남루한 냄새인지, 걸어오는 동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내 안에 두시는 안식이란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지를 역설적으로 일깨우는 걸음이었다. 나는 나의 애굽에서 건지심을 받은 바,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92:12-13).”

 

내가 무슨 수로 이룬 것이 아니라, 주의 뜰에 심겼음이었다. 늘 같은 날이 연속인 것 같고, 그래서 무료하고 따분할 것 같은데, 주의 은혜라.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14-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