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전봉석 2019. 6. 8. 06:4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여호수아 21:45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시편 93:2-3

 

 

말씀을 행한다는 것이 때론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이어서 이러는 게 과연 맞나? 싶을 정도이다. 그저 해가 뜨고 바람이 불고 아침이 되었다가 점심을 지나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지만, 주시는 날을 묵묵히 사는 것이다. 힘든 날은 힘든 대로, 평범한 날은 평범한 대로,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1:21).” 그럴 수 있는 것은,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7:14).” 오늘은 어떨는지 나는 알 수 없으나 오직 주를 의뢰하는 것으로 하루를 맞이하고 보내는 일이 곧 말씀을 행한다.’는 게 아닐까?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1:22).”

 

가끔은 혼자 있는 시간이 힘들다가도 이처럼 말씀을 읽고 의미를 헤아리며 풀어주시는 길을 따라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귀하다. 아이가 돌아가고 설교 원고를 마무리하였다. 곁을 같이 하는 사무실은 다들 어떠한지 이번 주간은 거의 비어 있었다. 덩그러니 혼자 있을 때의 고즈넉함이 좋다가도 싫다. 설교 원고를 뽑아 교정을 본다고 잠깐 소파에 누웠다가 잠들었다. 언제부턴가 나의 날들이 단순하여서 좋다가도 싫다. 누구와 통화라도 해야 하는데, 생각만하다 그냥 두었다. 가끔은 나에게 저 아이 하나로 족할 때가 있다.

 

알아듣기나 할까? 같이 성경을 읽고 하루를 격려한다. 주신 것에 감사를 표한다. 그렇게 들려주는 말은 고스란히 나에게 들려진다. 내게 하시는 말씀이라. 나는 야고보 사도의 진술을 음미하였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23-24).” 그러니까 이처럼 글로 쓰고 또는 듣고 되새기며 묵상한다 해도 이를 행하지 아니하면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고 금세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 말씀을 느끼고 생각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소리겠다. 그런데 그 행함이란 의도적이고 의식적이어서 남에게 보이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럼 일상에 스며서 종종 자신도 굳이 분간하지 못하는 하루가 되는 것이다. 그런 내게 아이와의 시간은 어느 때보다 가깝게 주를 의지하는 순간이 된다. 단지 안타깝고 불안한 마음 때문이 아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5).” 어찌 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다.’ 이처럼 나의 글에, 의식의 대부분에 머무는 것으로,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로 복을 받으리라.’ 하는 말씀 앞에서 생각을 모은다. 결국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 떠벌인다고 해서 경건이 더해지는 것은 아니라.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1:38).”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자기 혀에 재갈 물리라.’는 것은 헛된 말로 과장하거나 축소하여 그 의미가 퇴색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겠다.

 

결국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한참을 머금고 있어야 진액이 나오는 말씀이다. 스스로도 속일 수 있는 게 말씀을 준행한다는 일이다. 행함이란 얼마나 위선적일 수 있는가를 여실히 되뇌게 해준다. 그런 거 보면 아이와의 시간에 덤덤할 수 있어 감사하다. 괜한 의미부여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냥, 그러는 것이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면서도 이를 잘 쓰고 못 쓰고, 좋고 나쁘고, 됐고 안 됐고, 평가하지 않으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의 잘 하고 못 하고 하는 게 무슨 대수이겠나?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란 전폭적인 의뢰이다. 이는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7).” 저가 내 앞에 있으니 나는 행할 따름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일부러라도 눈길을 돌려 현혹되는 마음을 바로 잡는 일이다.

 

가령 여자들의 옷차림이 너무 야해! 하고 아내에게 퉁명스럽게 말했더니, 그럼 더 시선을 조심해야지! 눈길을 돌려야지 그걸 자꾸 쳐다보면서 야하다고 생각하니까 야한 거지! 하고 핀잔을 주듯 말하였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명쾌한 답변이 된 것 같다. 마틴 루터의 말처럼 새들이 머리 위로 날아다닐 수는 있지만 그 새가 내 머리에 둥지를 틀게 하는 것은 죄다.’ 현혹됨이란 거기에 시선을 두고 그 일에 가담하는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여 자기 마음을 믿는 일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겠다. 그러므로 나는 그냥, 한다. 아이와 있으면 불안이 엄습하여 평소보다 안정제를 불규칙적으로 먹는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면서는 유난히 어깨와 허리가 아파서 파스를 덧대어 붙인다. 그러면서도 한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모든 일상의 주어지는 일들도 다를 바 없다. 판단함은 악하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4:12).” 누가 어쩌니, 할 거 없다. 자칫 하나님의 마음에서 어긋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2:5).” 행여 누굴 업신여김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경멸하는 일이 된다.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6).” 결코 우리 혀는 길들일 자가 없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3:8).”

 

정치인들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어디 기독교 회장이라는 이가 그것도 설교 중에 발언하여 이슈가 되는 뉴스를 보다 마음이 답답하였다. 도대체 우린 무슨 생각으로 사는가. 이는 우리에게 주신 자유와 말씀을 어그러지게 하는 일이다.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5:6).” 누가 어떠하든, 세상이 어떠하든 그것으로 선동하여 아멘을 유도하는 저의 설교에 몸서리쳐졌다. 두려운 일이란 세 치 혀때문이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나는 이처럼 말씀을 음미하고 되뇌며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것이 복되다. 우리는 인류공영에 이바지하기 위해 믿음을 가진 게 아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2:13).”

 

두려워할 줄 아는 게 힘이다. 자중하여 말씀 앞에 부복하는 것이 지혜다. 너무 한심하게 아무 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 같아 빙충맞을 때도 있지만 나는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의 이야기를 사랑한다. 저의 무던함과 묵묵함을 귀히 여긴다. 모든 비유를 익명으로 처리하시던 주님께서 굳이 그의 이름을 강조하여 언급하신 사실에서도 보면 그 의미가 새롭다. 나사로의 뜻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다른 게 뭐 그리 대수이겠나? 건강이 부요함이 능력과 권세가? 왜 부자는 음부로 떨어진 것일까? 저는 저의 곁에 두신 나사로로 인하여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니,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부정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지금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잃을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양심에 찔리고 괜한 불편함에 사로잡힐까봐. 그러느니 외면했던, 말씀이다. 증거다. 선지자다. 메시지였던 것이다.

 

이를 해소하는 길은 단순히 또 오늘을 사는 일이다. 그 집에 버려지듯 팽개쳐진 그대로, 헌데를 앓는 그대로, 개가 와서 핥으며 비참하기 짝이 없는 모든 순간에도 저의 묵묵함은 온전한 의뢰에서 오는, 나사로였다. 그렇게 나는 혼자 있을 때, 또는 힘에 부칠 때, 그저 시간에 따라 청소기를 돌리고 남의 사무실 앞까지 걸레질을 하고 땀에 흥건하게 젖어 한 주간을 정리하듯 또 그렇게 금요일을 보내면서! 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21:45).” 우리의 삶은 주의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응하여지는 것이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93:2-3).” 나는 다만 찬양한다.

 

찬양은 시다. 시는 언어 너머의 의미다. 그 여백이 가득한 할 말이다. 고로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들의 모든 원수들 중에 그들과 맞선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원수들을 그들의 손에 넘겨 주셨음이니라(21:44).” 오늘 내게 두시는 이 한 날의 모든 여정이 가깝게는 나의 부모에게 약속하신 주의 말씀이 이루어짐이고 더 멀리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그 증거이다. 곧 오늘 나의 행함은 나의 후대에 미칠 약속의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허리와 어깨에 새로 파스를 한 장씩 붙이면서 끙, 하고 돌아앉으며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되새기며 글을 쓸 수 있는 것이 나에게는 복이었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의 옷을 입으시며 띠를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도다(93:1).” 고로,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들이 매우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니

여호와는 영원무궁하시리이다

 

-시편 9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