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전봉석 2019. 6. 9. 06:59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여호수아 22:5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시편 94:18-19

 

 

가끔 영화관에 간다. 영화보기를 좋아하는 것은 짧은 시간 안에 긴 이야기를,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어서이다. 또 하나는 왁자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견뎌내고 마주해야 하는 나 자신의 어려움 때문이다. 어제는 무슨 영화제에서 상 받은 것을 보았다. 불편하고 고약하고 무리한 설정의 이야기였다. 특히 해외에서 상을 탄 영화들의 특징은 그처럼 과도한 의미부여가 신선함과 낯섦과 불편함을 동시에 갖는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느라 먼 길을 걸어 휘적거리며 다녀오는 산보를 좋아한다. 영화관을 나와 거리를 걷다보면 두 세계의 괴리감으로 한동안 말을 잃는다. 나의 동선은 언제나 비슷하여서 늘 같은 곳을 오가는데 그때마다 변하는 것은 나 자신일 뿐이다. 내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느냐와 상관없이 세상은 여전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 이들에게 오늘 말씀은 일갈한다. “오직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22:5).” 마침 어제 오후에 아들과 통화를 했다. 서로 어찌 지내는가 안부를 묻고, 나는 말하길 대사관이 돼도 좋고 안 되면 더 좋고. 어찌 인도하시든 묵묵히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에게 친근히 하고.’ 오늘 아침 이 말씀의 의미를 당부하였다. 흠 없이 무탈하게 살면 좋겠으나 그럴 때면,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94:18-19).”

 

이처럼 한두 구절의 말씀으로도 이미 우리의 갈 길을 알고 위로와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주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그 도리와 의를 행하게 하시는 권능이 함께 하신다는 소리다. 여전히 어리석고 연약하고 어설플 수밖에 없지만, 주와 맺은 언약은 엄연한 것을 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31:31).” 그 언약은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3).” 무엇을 보고 어떤 일을 겪고 무슨 우려와 근심에 사로잡히고 직간접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해도,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시고 나는 주의 백성이 되었다는 이 명백한 사실 앞에서 감사할 따름이다.

 

사회의 일면을 응축하여 이를 감독의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연출하는 데 있어, 저이가 실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는 말에 그도 그럴 것이란 생각을 하였다. 다루는 주제가 다소 그렇다보니 아무리 작품은 작품이라 해도 그것이 현실과 무관할 수 있겠나.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 그런 내용일 테고, 말하고 또 말하고 듣는 것들이 또한 그러할 테니. 배우나 감독이나 그 화려함 뒤에 얽힌 고단한 영혼의 사투를 이해할 것도 같다. 걸어오며 딸애의 이런저런 이야기에 그도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주로 하고 누구와 자주 시간을 보내고 어떤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지금 그 영혼의 상태라. 소위 말해 카멜레온 같은 저들의 삶이라는 게 한 생을 사는 데 있어 참으로 기이하기는 하다.

 

실제 카멜레온은 한 곳을 동시에 응시하지 못하는 두 눈을 가졌다. 하나는 이쪽을 바라보면 하나는 저쪽을 바라본다. 저의 강력한 무기는 혀끝의 빨판인데 그 실제는 사람 혀보다 400배나 찐득하다. 그것을 0.3초 만에 뻗어서 곤충을 낚아챈다. 어제 오후 동물의 세계에서 보았다. 보면서 우리의 못된 죄의 본성을 연상하였다. 감독이나 배우의 일을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그저 직업은 없다. 그것으로 우리는 한 생을 산다. 다음 생을 운운하는 데는 어리석을 따름이다. 죽음 너머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종종 영화를 보다보면 파리지옥이란 식물 같다. 활착 잎을 열고 곤충을 기다린다. 저를 현혹시키는 향취를 낸다. 저의 특징은 기다림이다. 그렇게 들어와 안착한 곤충은 오므린 잎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는다. ‘벌레무덤이다. 그 중에 네펜데스는 살을 녹이는 분비물을 내어 먹잇감을 녹여버린다. 갇힌 곤충은 서서히 죽음을 맞이한다. 저것들의 특징은 그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배우나 감독의 길이 어떻고 하는 말과 상통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로서는 다른 길이 없다. 영화도 일종이 모색이라. 새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다른 세계를 엿보는 작업이다. 그러나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26:26-27).” 이를 행하게 하리니’, ‘지켜 행할지니라.’ 말씀은 먼저 제시하고 있었다.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28).” 언제부턴가 노골적으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고, 사회성이 떨어진지 오래인 나로서는 영화라는 종합장르의 응축이 사유의 역할을 한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이란 것도 일정한 가면을 쓰고 스쳐가는 것일 뿐이니. 물론 나는 관조적인 신앙으로 달관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신앙은 득도가 아니다. 나름 치열한 사투 쪽이다. 나는 나로 사는 게 가장 어렵다. 내 몸을 이끌고 사는 일로도 힘겹다.

 

그림이 그렇지 오며 가며 쫓기듯 건물 화장실을 찾고, 영화관 안에서는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에 불안해하고, 많은 인파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럼에도 그리 두시는 날 동안에 나는 내게 행하시는 주의 손길에 주목하려 한다. 나는 이를 이해하기를, 성령의 내적 사역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5:24).” 그러면서도 십자가 위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사는 것은 아닐까? 이로 인한 환난을,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나의 이로 인한의 주체는 언제나 나의 연약함이고 부끄러움이고 끌고 다녀야 하는 육신이다. 이 모두는 실제인 것이다. 종종은 내 코가 석 자인데도,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도 그것으로 누구를 생각하고 위하고 주의를 기울여 마음에 두고 기도하고 접촉하는 것이다.

 

가령 영화관을 내려오면서 한 아이를 만났다. 네댓 번 글방에 왔던 초딩 6학년 아이였다. 야한 옷차림을 하고 한 무리의 또래들과 같이 지나갔다. 나와 눈이 마주쳤고, 나를 알아보고 다시 돌아보기까지 하였으면서도 얼른 모르는 체 사라져갔다. 부모와 떨어져 보모 할머니와 산다던 아이. 그 부모도 각기 떨어져서 엄마는 여러 개의 유흥업소를 하고 아빠는 무슨 건축을 한다고 했던. 종종 기억이 나던 아이였는데, 설마 우리가 같은 영화를 보고 나오던 길이었을까? 나는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오래 아이를 생각했다. 그러다 또 어디에서 세수도 안 한 것 같은 중2 아이를 만났다. 부끄러운 듯 아이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고 아내와 서로 우스갯소리를 주고 받으며 곁눈질로 나를 자꾸 돌아보았다. 언제 등굣길에서 나를 보고 유난히 불쌍하게 보였다고 말한 그 아이.

 

서울 어디에 무슨 아파트가 나왔는데 만약에 되면 갈 거야? 아내의 뜬금없는 소리에 여기서 우리 사역이 끝나면, 하나님이 가라하실 테지. 나의 말에 아내는 교회로 오는 아이들 한둘을 염두에 두고 그러는가 하는 것을, 당신 공부방으로 오는 모든 아이들도 우리에게 보내시는, 한 영혼 한 영혼이다. 나의 말에 아내는 새삼 자신의 일도 사역이란 데 정신이 번쩍 드는 모양이었다. 방금 저 두 아이만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기도이지 않겠나. 당장 예배에 나오고 교회로 오지는 못해도. 우리는 그저 사느라 삶을 허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2:28-30).”

 

다만 주가 무슨 일을 어찌 이루어 가시는지 다 알 수는 없어도, 오늘 여기에 우리를 두시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어서. 우리는 더욱 주를 의뢰할 뿐이다. “너희에게 명령한 명령과 율법을 반드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의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오늘 말씀은 우리가 마주하는 땅에서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항상 붙들고 따라야 하는 삶의 지침인 것이다. 그러할 때, “여호와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반석이시라(94: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