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사사기 7:2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편 103:14
아픈 게 일인 사람이라, 아이와 같이 시편 99편을 읽고는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9).” 우리가 하나님을 높인다는 게 무얼까? 묻고 생각하다 깨달았다. 어떤 이념이나 철학이 아니다. 낭만이나 관념도 아니다. 주신 대로 사는 일이고 두신 대로 더하는 일이다. 그저 팔자소관으로 돌려 운명을 운운하는 소리가 아니라, 아프다면 아픈 것으로 힘들다면 힘든 것으로 주를 바라는 일. 너무 일찍 일어났고 너무 일찍 서둘렀던 아이는 여덟 시를 조금 넘겨 글방으로 올라왔다. 같이 글을 쓰고 성경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지금 우리에게 두신 일이라. 그 일로 사는 것이다. 삶으로 충실할 수 있다면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리 읽혔고 생각되어 설명하였다.
우리가 어찌 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이미 우리와 상관없이도 거룩하시다. 우리가 예배하지 않아도 앞서 충분히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하는 것은 주의 거룩하심에 참예하는 것이다. 같이 읽고 이해하다 설명이 살아났고 묵상은 깊어졌다. 아이가 그 구절을 글씨로 옮겨 쓰는 동안 나는 그런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프지 않았으면 네가 내게 왔을까? 내가 너를 주께 바라며 구하였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말하지는 않았다. 희미하고 막연하지만 종종 느끼는 어떤 충만함. 쁄라, 성도가 안식하는 땅.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사 62:4).”
곧 하나님의 기쁘신 뜻, 헵시바. ‘오직 너를’ 그리 부르신다는 데에 주의 기쁨이 함께 하시는 것이었으니.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42:8).” 그 하나님이 오직 나를 그처럼 부르시고 그의 땅에 두신다는 소린데! 온 몸에 파스를 붙이고 어디가 아픈 것과 달리, 심리적인 요인인지 신체구조적인 문제인지 알 수 없으나 가슴이 답답하고 숨 쉬기가 어려운 증상이 되풀이 되면서, 나야말로 일이라. 이 몸 하나 건사하는 일이 이처럼 고단한데, 저 아이라. 나는 아이를 보면서 ‘나 밖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왜 더 주를 바라고 구하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주의 기쁘신 뜻, ‘헵시바’라. 모든 일을 이루시고 행하시는 것이었으니.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삿 7:2).” 우리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신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4).” 그러므로 사람은 둘로 나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와 자녀 아닌 자. 주의 종과 도구. 이처럼 말씀 앞에서 나의 나 된 것을 돌아보며 주를 의뢰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인지. 아이는 기도 중에 ‘어디서 짐짝 취급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하는 표현을 썼다. 누군가의 무시와 경멸과 조소를 저도 아는 것이다. 이를 주께 고하고 아뢰는 일이다.
이런 일을 고하고 주께 바랄 수 있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황망할까! 오늘 우리에게 이와 같은 연약함을 두시고 곤고한 중에 거하게 하심이 복이라. 그 일이 좋은 게 아니라, 그 일 가운데서 주를 바랄 수 있었던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로 살게 하심이 귀한 거였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처지로 신세한탄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아이를 곁에 두시는 이의 기뻐하시는 뜻을 살핀다. 아이가 돌아가고 조금은 답답하고 힘들어서 산보를 갔다. 멀리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일이지만 천천히 걸으면서 세상과 상관없이 혼자 걷는 길 위에서 생각하였다. 주를 바란다는 일은 실전이다. 생의 최전방의 일로 무던히 더하여 사는 일이다. 막연하여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사 42:6-7).”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누구의 말동무가 되고 저의 안부를 묻고, 그러기에는 내 코가 석 자인데도 주가 두시는 마음이라. 그리 순종하며 가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것 같으나, 이 전쟁은 어차피 주가 치르실 것이다. 오늘 말씀은 그리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나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이가 이르시기를,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경계하게 하신다. 행여 나는 주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가 한 줄 알 것이다.
나는 충분히 그럴 위인이다.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그리하여 가장 적당하게 적절한 위치에서 감당하며 살게 하신 일이었으니, 나는 ‘단지 먼지뿐임을.’ 내가 하나님 앞에 주장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 대하여 오히려 안도하게 되는 마음이 신기하였다. 내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게 사명이 아닌 것이다. 이 글을 누구에게 들려주어 인정받는 게 목적이 아니다. 저 아이를 돌보며 누구에게서 인사를 듣고, 그것이 고마운 일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주께서 우리의 흑암 중에 감추신 보화가 있었으니, “네게 흑암 중의 보화와 은밀한 곳에 숨은 재물을 주어 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인 줄을 네가 알게 하리라(45:3).” 이 마음이 귀한 보화였다. 주를 바라고 구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이 처지가 가장 호강하는 것이고 특혜인 삶인 것이다.
이를 그렇다고 여길 수 있는 게 주의 자녀이고 종이었다. 도구로서의 사람이면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 것이 분명한데, 주의 자녀인 내가 그러할까 하여 주는 막으신다. 주가 치르시는 전투인 것이다. 그렇듯 그저 나는 나 하나를 돌보고 아이 하나를 건사하는 일에도 쩔쩔매는 주제라, 나의 의견을 묻지 않고 광야로 몰아가시는 곳에서도 주만 바랄 뿐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면 주님도 그러하셨고 모세나 다윗이나, 아브라함이나 노아나 저들 삶도 모두 그러하였을. 그리하여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우리는 주의 기쁘신 뜻을 따른 헵시바라. 그의 안식의 땅 쁄라에 거하는 것이라.
고로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03:22).” 오늘이 주가 다스리시는 곳이라. 나는 저의 지으심을 받은 것이고, 하면 이런저런 고단함에 대하여는 다 그의 선하시고 기쁘신 뜻이 있어서 이루어 가시는 구원 사역이겠거니. 그렇든 어떻든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1).” 송축이란 이 모든 것을 주께 돌리는 일이다. 내가 주의 백성이나 주의 종이며 주의 자녀라면, 내 의견과 상관없이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따르는 것이다. ‘흑암 중의 보화’를 알기 때문이다. 이를 예수께서 증명하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4).”
감히 내가 누구를 대신하여 고난을 받는다고 할 수 없으나,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몸소 조금은 알겠다. 내 몸이 어떠하든, 하고자 하는 일이 늘 어떻든지 간에. 내 의견과 상관없이 나를 몰아세우곤 하는, 이것이 심리적인 요인이든 신체적인 요인이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나는 주를 바랄 수 있다는 것이고 바라고 있다는 것이고 바랄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써,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는 사도의 결의가 내 것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앞으로 어찌되든 또는 지금이 어떠하든.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 103:2).” 곧,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03편 중에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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