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
사사기 4:2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편 100:3
한낮에는 더운 열기가 창을 때렸다. 그간 추위로 힘들더니 이제 더위를 견뎌야 하는 계절이 되었다. 사는 데 따른 어려움은 항시적이다. 고난은 간헐적이지 않다. 믿음의 시련은 그럼에도 금보다 귀하다. 역경은 항시 믿음을 요하기 때문이다. 주께서 함께 하심을 붙들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견딜 수 없어 저마다 세상이라는 갈대 지팡이를 짚는다. 번번이 손을 찔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왕하 18:21).” 오늘 시인은 이를 주의케 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 100:4, 5
고난의 순간에 감사함이란 불가능하다. 탄식과 원망이 먼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우린 ‘그의 문에 들어간다.’ 주신 날을 사는 것이다. 찬송이란 주를 의지함이다. 더는 그 누구도, 무엇도 의지하지 않을 때 나오는 소리다. ‘그에게 감사하며’ 산다는 일은 주신 한 날을, 그의 문에 들어가듯 그의 궁정에 거하는 일이다.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몸은 아프고 마음은 어렵다. 일은 꼬이고 상황은 계속 볶아친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을 송축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는 선하시’다는 것을 의뢰하기 때문이다.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것을 안다. 성경이 그리 기록하였고, 나의 지나온 날들이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를 것이다. 믿음으로 안다. 이 믿음을 알게 하는 것이 역경이다. 나의 어려움이다. 내가 만일 나의 어려움을 일일이 서술한다면 끝도 없다.
그럼에도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이를 이성적으로 설명하여 논리적으로 증거할 수 없다. ‘그저 내 입에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하는 것인데 어째서 홍시 맛이 나느냐고 물으면 무엇이라 답할까?’ 믿음이란 믿을 수 없고 바랄 수 없는 중에도 그리 믿어지고 바랄 수 있는 것인데, 나도 그것이 어째서 그런 줄 설명할 길이 없다. “이와 같이 이 날에 하나님이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게 하신지라(삿 4:23).” 믿음의 삶이란 이와 같이 아이러니한 것이다. 그리하여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사 30:15).” 어찌 그러한가? 오늘 시인은 그 답을 준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시 100:3
알아서 그리 사는 게 아니라 사니까 그리 아는 일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한 것이 우리의 앎이다. 우리가 주를 안다는 것은,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그러니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아는 일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가?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알고 ‘이 문으로 들어가는’ 이 길이 얼마나 귀한가?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기 원한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기보다 하나님을 바란다. ‘너희는 알지어다.’ 무엇을 말인가?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다.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이 벅찬 앎으로 사는 일이란, 그러므로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더는 바라지 않는 일이다.
이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것’이다. 이 비밀을 이제 우리는 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눅 8:10).” 그런데 우리는 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5).” 곧 우리는 어떤 어려움 앞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주의 도우심이나 은혜가 아니라 주를 바란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를 다 아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도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7-8).”
아주 사소한 것이라고 여겨 기도하지 않으면 언제든 나의 척박한 이기심이 다시 고개를 들고 교만을 조장한다. 그리하여 근심이나 어려움이 주의 문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이에 그들이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건지시고(시 107:6).” 또한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13).” 그러므로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19).” 그 방법은 오직 하나이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20).” 모두에게 그러한지 나에게만 그러한지 나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이처럼 주의 말씀을 보내어 나를 고치시고 건지시는 주의 손길을 느낀다.
이번 주일은 아버지가 오시는 날이어서 따로 설교 원고를 작성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한심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설교 원고를 작성하지 않아도 되는 한 주간이 너무 홀가분하였다. 마치 숙제가 없는 날 같았다. 마침 오스왈드 챔버스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을 샀다. 존 번연에 이어 저의 글들이 나를 위로하고 붙들었다. 이는 말씀으로 고치시고 건지시는 손길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누구의 자서전이 읽히지 않는다. 현란한 문학적 상상력이나 창작에 매료되지 않는다. 시인들의 여백 너머 함의를 좇지도 않는다. 다만 주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는 하나님이 내 편이 아니신 것 같고, 날 알아주지 않으시는 것 같고,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시다. 뭐랄까?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든 외면하시든, 내 기도를 들어주시든 들어주지 않으시든, 무거운 짐을 벗겨주시든 더욱 짓누르게 하시든, 하나님은 하나님이신 것이다.
어디가 자꾸 아파서 아프다고 기도하며 낫게 해달라고 해봐야 또 아플 때도, 무슨 일로 마음이 어렵고 답답하여 이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 기도해도 일은 점점 더 꼬이고 외로움만 가중되고 힘에 겨울 때도,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이 한 구절 말씀으로 족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무언가? 어떠하든 나는 저의 것이고 저의 백성이고 저의 기르시는 양인 것을. 그러므로 죽이시든 살리시든.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사 42:2).” 그저 잠잠히 주를 바람이여!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3).” 그리 살아가게 하심을. 고로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4).”
이와 같이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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