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23 주일
사도행전 6:1-7
우리의 직분
6:1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6:2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6:3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6:4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6:5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6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6:7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들어가는 말
병들거나 어떤 어려움이 닥치면 우리는 대뜸 ‘벌 받은 것’으로 인식한다. 또는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하는 식으로 응징의 눈길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죄는 질환이나 장애가 아니듯 우리의 병듦은 잘못에 대한 죗값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회초리를 드신다. 하지만 이는 죗값에 따른 게 아니다. 죗값은 이미 십자가의 보혈로 속죄함을 받았다. 오히려 우리의 고난은 참 예배로 나아가는 출구다. 십자가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에겐 이러한 소리가 참으로 우스운 소리로 들릴 테지만, 저들에겐 무슨 말을 해도 온전하게 들릴 리 없다.
성경은 항상 우리의 들을 귀를 점검하신다.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겔 12:2).” 예수님도 확인하신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 이처럼 교회에 나오고 말씀 앞에 선다는 게 신비다. 기적이고 은총이다. 들을 귀 없는 자들은 듣지 못한다. 이는 엄연한 구분이다. 들을 귀 있는 자와 들을 귀 없는 자, 한 사람은 주의 종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주의 도구다. 도구는 아무리 훌륭해도 도구다. 도구는 결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도구에게 인격적인 관계를 요구하는 것은 난센스다. 다시 말해서 들을 귀 없는 자에게 들려주는 일이란 그래서 몹시 피곤하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우리가 주의 종인 것과 주의 종으로서 그 자세를 바로 하는 것에 대해, <우리의 직분>을 살펴보길 바란다. 앞서도 말했듯이 병듦에 우리는 단순하게 치유나 기적을 바라는 종교로 전락해선 안 된다. 종교적인 삶은 하나님을 대면하고 종으로 사는 삶보다 쉽다. 십자가의 구속보다 은혜를 구하는 쪽이 쉽다.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고 그의 자비하심을 좇는 길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일보다 위로가 크다. 신앙을 매력적인 삶으로 여기며 사는 게 제자의 삶보다 근사하다.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이 기도와 말씀의 삶을 사는 일보다 역동적이어서 보람도 크다. 그래서 병들고 실패하면 순간 하나님을 A/S 기사로 취급한다. 상냥하게, 교회는 사랑의 하나님을 홍보하고 봉사와 구제를 표면에 내세운다. 과연 우리의 직분은 어떠해야 할까?
성장과 부흥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1).”
믿음이 확고하고 신앙이 투철하면 자기의 완고함이라는 늪에 빠지기 쉽다. 기도 생활과 말씀 묵상을 의식적으로 한다면 이를 자기 수고와 애씀으로 둔갑시킨다. 헌신과 봉사는 드러나면 원망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3-4).” 이는 경고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 왜냐하면 우리 속에는 본능적으로 ‘외식하는 자’의 자의식이 존재한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 사람으로 살면서 사람들의 칭송을 거절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자기만족이 저들의 상이다(5).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곧 우리는 믿음이 자랄수록 예전의 죄악 된 모습을 마주한다. 이는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심이다. 중보기도는 측은지심이나 동정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곧 무엇이 중요한지를 분별할 필요가 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5-16).” 고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 2:2-4).” 우리의 성장과 부흥은 오로지 우리의 영적인 성숙의 문제다. 교회가 비대해지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사회에서 목소리가 커지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2).” 무엇이 우리에게 마땅한가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 서로에게 빚진 자들이다. 주의 사랑을 섬김으로 갚고자하여 구제와 헌신을 한다. 그런데 종종 이것이 교회의 명분을 쌓는 것으로 전락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 13:15-16).” 그러므로 참된 구제는 일상 가운데서 자신도 모르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를 기억한다는 것은 이미 그 공적을 자신에게 돌린 결과다.
직분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3).”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러 직분을 맡기신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6-8).” 그래서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1-12).” 이 모든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 됨에 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딤전 3:8-10).” 저들은 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또한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7-9).” 이 모두는 사역이다.
사역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4).”
우리는 모든 직분을 포함한다. 한 번 내딛은 이 걸음은 거둘 수 없다. 주춤거리거나 돌아설 수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갈등이 증폭될 뿐이다. 사역이란,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가는 삶이다(시 100:2). 그리하여 운전자는 핸들을 잡고, 주방장은 주장에서, 가정주부는 집안일에서 그 시간을 충실하게 보낸다. 병든 자는 아픔으로, 장애인은 장애를 딛고, 가난한 자는 가난으로 몸서리치면서도 우리는 모두 주를 바라고 그의 도우심을 의뢰하며 간다. 고로 사역이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 지는 일’이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삶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곧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게 먼저다. 자기 일을 웃어넘길 줄 아는 삶이다. 흔히 자기 코가 석 자고, 자기 앞가림을 우선적으로 여긴다.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그런 주의 사람은 없다. 모세와 다윗이 그런 식이었다면 결코 그들은 자신들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바울이 그런 마음에서 놓여나지 못했다면 저는 죄책감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오늘 본문에서 사도들의 결의는 모두를 흡족하게 하였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5-6).” 누구는 구제와 헌신을 누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쓴다. 그러므로 성실함이란 무던히 자신에게 맡기신 길을 가는 것이다. 노아는 노아로 살며 노아의 방주를 지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을 따라 그의 길 위에서 주의 말씀을 묵묵히 따라갔다. 그때마다 우리의 공통된 부분은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20).”
즉 앞서도 말했듯이 들을 귀 있는 자에게, “그의 말씀을 보내사 그것들을 녹이시고 바람을 불게 하신즉 물이 흐르는도다(147:18).” 곧 받아들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행 19:20).”
나오는 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
우리 앞에 점점 왕성하여져 가는 것은 교회의 재력이 아니다. 사람들의 숫자가 아니다. 사회에서의 목소리가 커지는 게 아니다. 말씀이다.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져야 한다. 그러므로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 3:18-20).” 우리의 성장과 부흥은 말씀을 중심으로 행함과 질실함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완전한 자가 되려는 게 아니다. 죽는 날까지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완전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달라지는 자신을 느껴야 한다. 전에 즐기던 것에서 놓여나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야 한다. 여전히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그것으로 교회 부흥을 꾀하고 직분을 다한다면, 보다 나은 사회는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질 때, 제자의 수가 많아진다. 그 도를 따르게 된다. 제자란,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고로 주시는 바, 한 날 한 날의 삶에 충실한 것이 중요하다.
이에 지혜자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야고보 사도도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이 단순한 삶이 우리의 삶이다. 직분을 맡은 자의 구할 것은 충성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그러므로 우리의 직분은 무던히 두신 자리에서 묵묵히 믿음으로 준행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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