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09 주일
행 3:17-21
새롭게 되는 날
3: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3: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3: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3: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들어가는 말: 우리의 무지함에 대하여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행 3:17).”
우리의 믿음을 훼방하는 것은 종종 우리의 믿음이다. 우리의 신념을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삼고,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거나 왜곡한다. 이는 무지에서 오는 것이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곧 우리는 ‘진리’가 아닌 자신의 ‘진리추구’에 더 가치를 둔다. 우리는 누구도 우리 자신을 잘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 그런 우리에게 오셨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7-8).”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하려 들다 그 영혼이 상한다. 교회에 실망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는 경우는 그래서다. 상한 심령은 괴팍하고 모질다. 무신경하고 무감각하고 무책임하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른다. 가령 우리가 우리에게 보내시는 아이들을 대할 때, 그 아이들이 대체로 드세다. 이는 누구의 탓이 아니다. ‘왕따’를 당하는 아이나 시키는 아이나 저들은 동일하게 상한 심령이다.
그럴 때 사회는 교육의 질을 높이고, 심리치료 상담사를 상주시키면 보다 나아질 줄로 여긴다. 배우면 배울수록 좀 나아질 거라 여기는데, 노여움은 깊어가고 인색함은 완고하여 간다. 자신들의 분노와 어리석음을 스스로 주체할 길 없다. ‘주님의 마음’이 아니면 우리는 서로를 대할 여력이 없다. 내 코가 석 자다. 자기 앞가림도 하기 힘들다. 자기 하나 건사하는 일도 벅차다. 그렇듯 우리의 신념이나 헌신이나 봉사나 희생 따위는 우리를 감당할 수 없다. 심리학적으로 신경증을 세분화한들? 교육학적으로 우열을 가리면서까지 양질의 교육을 퍼붓는다한들? 사회학적으로 각각의 이데올로기를 합치한들? 이 모두는 무지함 때문이다. 우리의 무지는 죄다.
몰라서 우리는 우리의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행 3:15).” 오늘 말씀은 우리를 붙들어 우리의 실체를 마주하게 한다. 앞서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다(18). 여기, 성경이 있다. 곧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여기에 있다(21). 이로써 우리의 무지함을 깨닫는다. 자신이 자신을 잘 안다고 여기던 것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급선무가 무엇인지를 알아간다.
1. 하나님과 화목함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행 3:25).”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떤 자격이나 기준을 통과하여 선별된 구원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죽어 마땅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이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으셨다. 그의 죽으심으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여졌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우리는 ‘언약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곧 우리는 주를 증거하는 사람들의 자손이다.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믿음의 사람들이 우리의 조상이다. 그들과 세우신 언약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용하다.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저마다 다음 세대에 있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된다.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26).” 고로 우리는 우리들 저마다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첫째, 과거의 나 자신에 대하여 죄책으로 연연해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은혜에 대하여 송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둘째, 오늘의 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다. 그때 즐기던 것들로부터 해방되었다. 셋째, 미래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성장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분량에까지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하나님과 내가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제든지 주의 이름으로 구하고 아뢰며 주 앞에 나아올 수 있다. 주를 더욱 사랑함으로 주께 나아가길 원한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욥 22:21).”
2. 복음의 기쁜 소식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행 3:19-20).”
‘새롭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다. 완전하게는 주의 재림의 때다. 그럼에도 지금 또한 그 변화를 거친다. 여전히 미약하여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나, 복음의 기쁜 소식을 감사히 여긴다. 성령은 이를 우리에게 계시로 열어 보이신다. 이처럼 계시란 열어보이심인데, 열어 보인다는 것은 그저 막연한 게 아니다. 물론 신비롭다. 이런 글이 읽힌다. 이런 말씀이 들린다.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청맹과니가 아니고는 눈 뜬 자가 못 볼 리가 있겠나? 청각장애인이 아니면 들리는 소리를 못 들을 리가 있겠나? 그런데도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막 4:23).”고 하셨다. 이는 다시 말해 들을 귀 없는 자들이 허다하다는 것의 반증이다. 그처럼 싫다던 종교서적이 재밌다. 성경이 무궁하여 다채롭고 즐겁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것이 계시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20-21).” 오늘 말씀은 그 주님이 하늘 우편에 앉아 계심을 우회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에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이다. 이는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이 모두에게 전하여질 때까지이다. 들어도 못 듣고 보고도 못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쩔 수 없음으로 저들은 하나님 아닌 다른 데 눈을 돌린다. 다만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고로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사 52:7).”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날들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어느 훗날 주님은 우리에게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다하였다고 복을 더하시는 게 아니다. 자신을 희생하여 헌신함으로 불우한 이들을 위해 불사르게 내어주고 봉사하였다고 상급을 더하시는 게 아니다.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은 다만 이 모든 게 주의 은혜라. 우리가 주를 바라며 맡기신 날들에 충실하였음이 복되다. 하나님과 화목하였던 날이 가장 값진 것은 우리가 들어갈 영원한 나라에서 누릴 그 영광의 날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의 위대하심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행 3:21-23).”
이와 같이 주 앞에 나아와 말씀을 듣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귀한 일인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어쩌면 우리는 살아서 사는 날 동안에는 그 약속의 ‘새로운 날’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알 같이 약속의 씨를 두어 천만인의 아비가 될 것이라 하였으나, 이삭 하나를 얻었다. 모세는 끝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우리는 이처럼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다 해도 믿음으로 나아간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다는 것을 믿고 알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리의 위대함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이다.
이 위대함을 잠언에서 몇 가지 증거로 찾았다.
첫째, 우리는 충실하다.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에게 시중드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잠 27:18).” 곧 주신 바 주신 날을 묵묵히 준행하는 삶이 충실이다. 분수에 맞게 마땅히 행할 것을 행함으로, 마땅히 행할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둘째, 불의를 멀리하게 한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23:17-18).” 다들 누구를 부러워하는 게 세상이다. 거기에서 죄가 싹튼다. 저와 비교하여 자신을 몰아세운다. 그 경쟁구도는 되풀이 될 뿐이다. 세상은 온통 기울어진 운동장 같다.
셋째, 우리는 옳은 길을 간다. “정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이요 죄인에게는 패망이니라(잠 21:15).” 정의란 무엇인가? 무엇이 더 옳고 그름의 정도가 아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책이 옳은 게 아니다. 많은 것 중의 하나가 정의가 될 수 없다. 오직 정의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일이다.
넷째, 우리는 순종한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29:18).” 묵시란 하나님이 숨기신 일이다. 하나님은 일을 감추신다. 우리는 이를 살핌으로 근신하고 온유하며 순종하는 삶을 산다.
다섯째, 우리는 성취와 감동을 얻는다.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13:12).” 고로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27:9).” 우리 안에 두신 착한 일을 행하시나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와 같이 우리의 경건은 겸손과 절제와 적당함과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① 겸손,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16:19).”
② 절제,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30:7-9).”
③ 적당함,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25:16, 27).”
④ 공동체,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5:18).”
4. 성령의 권능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 3:11-12).”
늘 사람들의 시선은 딱한 데 가 있다. 어떤 기적으로 연연해한다. 병든 몸이 낫기를, 사업이 잘 되길, 이 땅에서의 유익을 우선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 이들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기적에만 정신이 팔려 흥분하였다. 이를 “왜 놀랍게 여기느냐?” 그런 저들을 향해 사도는 외친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간증은 그래서 보라는 달은 못 보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기 십상이다. 뛰어난 목사를 위시하여 교회가 부흥한다. 어느 찬양 집회가 무슨 은사 집회가 교회 부흥을 주도한다. 그런데 교회를 향해 오늘 말씀은 일갈한다.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13-15).” 정작 예수를 거부한 것은 나름 저들의 철저한 믿음이었다. 상당히 종교적인 지도자들이었다. 심지어 빌라도도 예수의 죄 없으심을 알고 놓아주려 하였으나, 우리는 이를 거절하였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
곧 오늘의 기도 응답이 능사가 아닌 것은,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우리는 다만 그의 쓰심에 합당하였으면 족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나오는 말: 우리 삶의 증거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행 3:26).”
안 믿는 이들이나 믿는다고 여겨 스스로의 믿음을 신념으로 삼고 사는 이들에게,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 1:8-9).” 성경의 외침이 두렵게 들린다. 우리의 증거는 뚜렷하였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곧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으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것이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5-16).”
이로써 우리는 주의 말씀으로 산다. 그리하여 우리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저들을 이해하고 용서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흔 번씩 일만 번이라도 용서를 받지 않으면 살 길이 없다. 고로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6-27).” 우리가 알아가는 성경의 지식은 그러므로 생명을 더한다. 하나님과 화목한 증거이다. 이에 우리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곧이어 완전히 ‘새롭게 되는 날’이 도래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영생을 살 것이다.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9-2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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