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전봉석 2019. 7. 18. 06:55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삼상 12:16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시편 130:5

 

 

결국 공항까지 가는 것은 어려웠다. 그래도 모처럼 오정희의 단편소설에 무대인 <중국인 거리>와 동화마을로 조성된 곳을 다녀왔다. 같이 어디를 가야 한다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꽤 오래 걸었고 그러느라 하루가 다 간 것 같다. 월미도에도 가서 차를 한 잔 했다. 운무인지 미세먼지인지 잔뜩 흐린 날씨는 후텁지근하였다. 아이들 어릴 때 자주 데리고 다니던 곳인데,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변해있었다. 어디는 여전하여서 아이들도 그때의 기억을 더듬고는 하였다.

 

덕분에 일찍 돌아와 저녁을 집에서 먹었고 아들애를 내보내기 전에 함께 둘러앉아 가정예배를 드렸다. 아직 설교 원고 초안만 잡았지만, 사도행전 81-3절 말씀으로 하였다.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무지(無知)와 안다고 하지만 이를 지혜로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無智)는 별개의 것이었다. 가령 아픈 아이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영적이니 계시니 성령이니 권능이니 하는 말을 터무니없이 과장되게 사용하고 있다. 이를 우려하며 누가 저의 그런 상태를 염려하였다. 물론 아이는 병적으로 그러하다. 한데 우리는 어떤가? 다들 자기가 아는 방식으로 자기 좋을 대로 믿고, 구하고, 열심을 다하는 것에 대하여,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8:1).” 곧 우리의 무지함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강조하였다.

 

주목하자. 하나님은 우리를 주목하신다. “내가 네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32:8).” 주의 하자.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5:15).”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13:7).” 그렇지 않으면 언제 어떤 시류에 휩쓸려 떠내려갈지 모른다. 오늘 본문에서 사무엘도 말한다.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삼상 12:16).” 나는 아들에게 다시 먼 곳에 나가 일하고 주신 바 그 생을 다하는 데 있어 무지함으로 자기를 마땅히 여기는 죄에 들지 않기를 당부하였다.

 

때로는 주의하고 주목하여 경건하게 살려는 우리에게 어려움이 임한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8:1).” 말도 안 되는 어려움이고, 하나님이 너무하시는 것 같은 괴로움이다. 그러나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2:10).” 세상이 너무 악하고 약하다. 호언하고 장담하던 이가 하루아침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나는 아들에게 보다 유연하고 헤아리는 마음으로 살기를 당부하였다. 자신의 고집이 결국 자신을 꺾을 것이다. 스스로 높아지면 하나님이 낮추신다. 다만 우리는 말씀만 붙들자.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함께 둘러앉아 예배를 드리고 아들을 배웅하였다.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만을 바라며 살자. 이는 모호한 소리가 아니다. 나는 욥의 증언을 묵상한다.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13:15).” 때론 우리 생각에 맞지 않고,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우리를 궁지에 몰아넣고, 심지어 나를 이대로 죽이신다 해도, ‘내 행위를 아뢰리라.’ 곧 나는 주를 의뢰하겠다는 소리다. ‘죽으면 죽으리라.’ 하였던 에스더처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하는 다니엘과 그 친구들처럼. 어떠하든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이 되라. 나는 당부하였다. 내가 내세울 건,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날을 함께 보냈었던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무지한 가운데 있을 때 스스로 나는 얼마나 그런 나를 마땅히 여기며 살았었던가? 평소대로 읽던 말씀이 아니라 앞서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씀이었다.

 

우리는 운다. 성도의 눈물은 기도다. 그냥 넋두리나 푸념이 아니다. 주께 아룀이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4:18).” 그럼 하나님은 무엇으로 기뻐하실까? 그의 자녀들이 그의 영광을 즐거워하며 기뻐할 때 기뻐하신다. 종종 우리를 궁지에 몰리게 하시는 것처럼,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80:12-13).” 난감한 상황에 처하곤 한다 해도,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32:10).” 결국은 주가 하신다. 주가 이루어 가시는 일이다. 다시 또 떨어져 살아야 하고, 내가 이러저러하여 나 때문에 미안한 일이지만, 그 모든 것들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서로에게 각자 주신 삶이다. 주를 바라자. 사람 보지 말고 말씀 붙들자.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누가 어찌 잘 사는가, 세상을 따라하지 말자. 공부 잘 한다고 돈 잘 버는 거 아니듯이 돈 잘 번다고 복된 삶을 사는 것 아니다. 묵묵히 주신 바 처한 상황 가운데서 주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35:9).” 결국 우리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삶이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벧후 1:8-9).” 부디 있는 데서 있는 것으로 충성하는 믿음의 자녀답게 살기를.

 

돌아보면 모든 게 무난하였고 적당하였다. 어느 것도 은혜 아닌 것이 없다. 그런 걸 혼자 속 끓이고 끌탕하며 염려와 근심에서 놓여나질 못하니, 나야말로 항상 연약함이라. 주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고 갈급할 뿐이다. 지난 주 토요일에 들어와서 며칠을 같이 있는 동안 괜히 긴장하고 괜히 서러워하였던 마음이 송구할 따름이다. 그 또한 나인 것을, 있는 모습 그대로 주 앞에 앉는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2:19).” 주 앞에 붙들려 사는 사람이라, 하나님의 권속이라. 이에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2).” 묵묵히 나아가자.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130: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