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전봉석 2019. 7. 20. 07:19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땅에 꿀이 있더라

삼상 14:24-25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132:1

 

 

우리의 종교심이 나쁜 게 아니다.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주술처럼 의지하여 위로를 받으려는 게 나쁘다.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종교심을 귀히 여기면서도 안타까워하였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17:22-23).” 하나님을 더듬어 찾고자 하는 마음이 나쁜 게 아니라, 이를 수단으로 삼아 다른 데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나쁘다.


오늘 본문은 사울 왕의 종교심이 그의 통치에 어떻게 악용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앞서 저는 전쟁을 앞두고 선지자만이 드릴 수 있는 제사를 손수 감행하였다. 우상이란 하나님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보면, 미신이란 하나님을 앞서려는 것이다. 전쟁 중에 저의 명령은 어리석었다. “이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곤하였으니 이는 사울이 백성에게 맹세시켜 경계하여 이르기를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복하는 때까지 아무 음식물이든지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였음이라.” 하나님은 무모한 헌신이나 희행을 바라시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백성이 음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땅에 꿀이 있더라(삼상 14:24-25).” 그러니 한 사람의 지도자가 하나님과 어찌 관계를 맺으며 사는 인격적인 사람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은 영원히 함께 한다. 엄중한 진노는 하나님의 집에도 임한다. “그들이 칠 때에 내가 홀로 있었는지라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분노를 쏟으시오니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모두 멸하려 하시나이까(9:8).” 이때 하나님은 중보기도를 원하지 않으신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하나님께 불가능한 단 한 가지는 용서다. 죄를 묵과할 수는 없다. 용서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이내 스스로 사람이 되어 우리의 죗값이 되어주셨다. 그러므로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는데,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하여는 중보기도를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곧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저가 선택할 수 있다. 진노나 사랑 둘 중의 하나를 말이다. 우리는 이를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12:29).” 그러므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8:29).” 우리로 믿을 수 있게 하시려고, 직접 우리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 것이었으니. 우리의 종교심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가? 그런데 이를 악용하듯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요구를 목적에 두려는 것은 사울 왕의 그릇된 통치 이념과 다를 게 없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글을 쓸 때는 물론 평상시에도 성령의 역사니, 영적인 세계니, 계시가 어떻고 영성이 어떻고 하는 아이의 광신적인 표현을 금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아이의 글은 더욱 중구난방이 되어 여러 사람의 말이 동시에 들리는 것처럼 어지러웠다. 말은 어줍고 표현은 더듬거렸다. 평상 언어를 쓰자. 일상 언어로 얼마든지 주를 찬양할 수 있고 겸손히 감사를 표현할 수 있다. 다른 때보다 어수선한 아이의 글을 읽고 아이엄마가 걱정이 되어 문자를 하였다. 그래서 그러한 사연을 설명해주었다. 아이의 종교심이 자칫 병적으로 기울어져 자신의 요구와 바람을 구하는 데 사용될까 염려하여서다.

 

이단이나 사이비 종자들의 언어가 지나치게 종교적인 것도 설명하였다. 우리는 애써 말을 많이 하여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6:7).” 또한 어떤 의식과 행위로 드려지는 제사에 있지도 않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목사가 오죽하니 아이의 입을 막고 종교적인 언어를 자제하게 하였을까. 우리의 그릇된 열심이 도리어 주를 바라는 겸손을 헤칠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울의 통치는 그러한 단적인 예이다. 저로 인하여 모두가 생고생이다. 굳이 없어도 될 열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그릇되게 왜곡할 수 있고, 자칫 자신의 신앙으로 우상이 되고 숭배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병약한 아이를 통해 우리의 헛된 망상을 엿보았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나름 믿음을 붙들고 신앙 안에서 견디면 하나님이 좋은 결과로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은 뜯어고치신다.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132:1).”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겸손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5).”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 의지하면 오늘 우리에게 두시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족한 줄 안다. 그런 가운데 감사를 배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곧 저의 소유인 사랑이나 은총이나 은혜를 구하지 하나님목적으로 바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할 때 신앙은 마치 이 땅을 살아가는 데 있어 위로나 위안의 정도이면 족한 것이다. 이를 어찌 다 문자로 설명할 수 없어 나는 다만 아이의 상태를 보고 그리 취한 나의 행동을 변명하듯 말하는 것으로 족하였다. 그저 다만, 기도합니다. 힘내세요. 내가 전할 수 있는 일상 언어로의 종교심이었다.

 

우리는 결코 광신도가 아니다. 지극히 평범하고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되레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란 바람처럼 그 길을 알 수 없다. 묵묵히 주어진 일에 무던하여서 주의 이름으로 겸손히 섬길 수 있는 것.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22:26).” 족한 줄 아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149:4).” 이 모두는 주가 하시는 일이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3:34).” 두시는 날 동안 주시는 일에 성실함으로,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11:25).” 때론 무모할 정도로 단순하고 순박하게, 이 모든 일에는 주의 뜻이 있음을 의뢰하면서.


주가 행하시는 것이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우리는 다만 주를 고백하며 겸손히 여기와 지금을 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 오직 주만을 의뢰하는 삶이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5:8).” 결국 내 마음과의 다툼이었으니. 그러므로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13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