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1 주일
행 8:1-3, 고전 14:12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사도행전
8: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8: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고린도전서
14:12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들어가는 말
우린 얼마나 무서울 정도로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으로 사는지 모른다. 그리 안다고 여기는 지식이 실은 얼마나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것인지, 가령 중학교 때 죽고 못 살 것 같던 게 고등학교만 올라가도 유치하기 짝이 없다. 채 스무 살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학창시절의 가치와 기준을 한심하게 여기기 십상이다. 그 때마다 가치와 기준이 달라지는 것으로, 우리는 종종 인생을 허비한다. 매우 일시적이며 단편적인 생각들로 말이다. 그럴 때마다 죽어도 변하지 않을 것처럼 굴지만 번번이 어림없는 일이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무지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일깨운다. 무지는 단순히 모르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한자어로 보면 간단하게 다르다. 무지(無知)는 없을 무(無)자에 알 지(知)자를 써서, 아는 게 없다는 뜻이다. 느낌이 없다. 생각이 없다. 기억이 없다는 뜻이다. 아예 모른다. 그리고 슬기 지(智)자를 붙여 무지하다고 하면, 알기는 아는데 지혜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아집과 교만을 버리고, 통회하고 자복하는 마음으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자.
1. 영적인 무지(無知)와 무지(無智)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1).”
하나님은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사울은 지금 자신의 일을 마땅히 여겼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지혜를 더하신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전 7:14).”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 1:21).” 바울이 바울 되기 전에 저는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일찍이 가말리엘에서 수학한 영재였으며 율법에 능한 자였다.
앞서 우리는 초대 교회가 성령의 감동으로,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 부흥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자발적인 구제와 헌신이 넘쳐 따로 경건한 자들을 세워야 했고 그 일을 감당하게 하였다. 그렇듯 교회가 세워져 가는 중에 스데반 집사가 설교를 하는 중에 돌에 맞아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을 두고 교회 밖에 있던 사울은 ‘그의 일’을 마땅하게 여겼다. 종종 우리는 그와 같이 자신의 열심과 의지를 우선한다. 이는 교회 안에서 종교행위로 나타나기도 한다.
1) 하나님을 믿을 지식이 없는 무지(無知)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 16:2).”
저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한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4:18).” 그러므로 저들 속에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왜 그럴까? ①스스로 지혜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는 ②어리석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들은 ③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꾼다. 그런 그들을 하나님은 내버려두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그 행태가 오늘 날 우리 사회에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1-25).
2) 믿는다고 하면서 지혜가 없는 무지(無智)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바울은 바울이 되고 난 뒤 자신이 사울일 때의 일을 숨기지 않았다.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행 22:20).” 성경도 이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정의하기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결국 우리의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곧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3-24).” 이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구분한다.
2. 성도의 고난은 구원을 이루어 가는 수단이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1).”
1) 우리의 고난은 끝이 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계 2:10).” 우리 성도에게는 ‘의미 없는 고난’이란 없다. 하지만 그 또한 지나간다. 하지만 죽음으로 끝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죽으면 끝인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죽음 너머 영원한 형벌이 있다. 이는 믿는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후 4:17).”
2) 우리의 고난은 말씀을 이루는 과정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 2:9).” 곧 우리는 환난을 당하나 환난 가운데 인격은 더욱 주를 소망하게 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우리의 고난은 비로소 하나님과 교제하는 소망을 이룬다. 이를 위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그러므로 성도의 고난은 모든 게 유의미하다.
3) 우리의 고난은 우리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한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이를 우리는 앎으로 알면서 알면 알수록 복음의 증인이 된다. 그러나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요 10:12).” 단지 이 땅에서의 이로움을 추구하는 것이면 아무도 이 증인 된 사명을 감당할 수 없다. 이에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행 20:28).” 우리로 교회를 살피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빌 1:14).”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우신 것이다.
3. 교회의 덕을 세우신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2).”
우리의 눈물은 단지 서러움의 표출이 아니다. 넋두리가 아니다. 푸념이 아니다. 신세한탄도 아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곧 우리의 눈물은,
1) 기도다.
2)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왜 믿는다고 더 열심을 다해 믿음을 지키려고 하면 힘들까? 어쩌면 이는 당연한 것으로 오늘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영원한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고로 성도의 눈물은,
3)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한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8).” 그러므로 우리의 눈물은,
4) 칭찬을 받게 하신다.
5) 마귀의 올무에서 건지신다.
우리의 눈물은 이와 같이 의미 있고 귀하다.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딤전 3:7).”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하는 말씀 앞에서 굳건할 수 있다.
나오는 말: 하나님의 섭리(攝理)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3).”
때론 하나님의 뜻을 알다가도 모르겠다. 우리 생각에는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 사역은 우리의 이해와 상식으로 가늠할 길 없다. 종종 우리는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숲 속의 멧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시 80:12-13).” 싶은, 암담한 현실 앞에서 난감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 32:10).” 결코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신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은 곧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영광을 위하여 나를 너희를 노략한 여러 나라로 보내셨나니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8).”
우리의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교회를 이뤄간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결국 음부의 권세가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다들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은 시대다. 우리가 전하는 이 복음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겔 3:7).”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자기 신앙 하나 바르게 지켜가는 것이 일이다. 믿음으로 굳게 서서 담대함으로 나아가자.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시 31:24).” 곧 우리 안의 무지(無知)와 무지(無智)를 꺾기까지 하나님은 쉬지 않으신다. 우리의 고난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단지 인생을 사느라 사는 데 드는 고단함이 아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이에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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